[전영백의 발상의 전환]<11>도시의 그라피티: 창작과 범법행위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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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영진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김영진 작가
동네 후미진 외벽에 어느 날 멋진 그라피티가 그려진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색채와 구성이 보통 솜씨가 아니었건만 제작자의 이름도 없고, 판매를 위한 게 아니라 모두를 위한 예술행위란 점이 신선했다. 그러나 동시에 공적(公的) 허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이런 마음의 갈등은 그 벽화가 누군가에 의해 손상되고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짙어갔다. 거리미술의 명암(明暗)이다.

우선 예술행위가 나의 일상공간에 개입한다는 발상은 좋다. 알 수 없는 작가들의 서명 없는 작업은 돈에 혈안이 된 자본주의 사회에 나름의 통쾌한 반란이 아닐 수 없다. 거리미술은 이같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 미술의 체제와 그 권위에 도전해 일상의 공간을 점유한다. 대중을 위한 대중의 미술행위. 그런데 이러한 무(無)소유, 무(無)통제를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얘기다.

영국 브라이턴의 동네 맥줏집 벽 한쪽에 그려진 ‘키스하는 경찰관(Kissing Coppers)’(2004년·그림)은 뱅크시라 불리는 작가의 그라피티다. 두 명의 남성 경찰관이 키스하는 장면을 스텐실로 찍어 그렸다. 경찰관의 동성애를 위트 있게 표현한 것. 공권력에 대한 뱅크시 특유의 풍자 묘사다. 그는 새벽에 순찰하는 경찰의 눈을 피해 얼굴을 가리고 재빨리 작업한다. 가명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이유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친 대중적 인기다. 뱅크시는 자본주의와 권력 구조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영국 특유의 비꼬는 위트와 블랙 유머로 전달하는데, 대중은 그 표현의 당돌함과 기발함에 흥분한다. ‘키스하는 경찰관’만 해도 대중의 관심이 몰려, 건물주는 누군가 손상한 본래 이미지를 다시 복구해서 플라스틱 보호막을 쳐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7년 후, 이 주인은 그라피티를 캔버스에 전사시켜 미국 경매에 내다팔아 57만5000달러(약 6억3000만 원)를 챙겼다. 그라피티를 통해 소비사회의 병폐나 반인권적 행위를 비판한 작품의 본래 취지와는 반대되는 결과였다.

인간의 물적 소유욕은 무섭다. 돈으로 살 수 없으면 구매욕이 더해지는 게 소비심리다. 이것이 거리미술의 비판성과 미적 의도를 뒤엎는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온 뱅크시는 이미 거리미술가가 아니다. 거리미술의 의의는 권력과 자본만능주의에 대한 저항행위란 점에 있다. 그러한 본의를 지킬 수 있는 거리미술, 얼마나 가능할까.

전영백 홍익대 예술학과(미술사학) 교수
#그라피티#거리미술#뱅크시#키스하는 경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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