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이종상 화백의 ‘서울 평창동’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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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가 말을 건다 “자네, 가슴으로 그리고 있는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을 배경으로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 선 이종상 화백. 이 화백은 평창동에서 3대가 어우러져 산다. 오른쪽 맨 끝 봉우리가 보현봉.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서울 종로구 평창동을 배경으로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 선 이종상 화백. 이 화백은 평창동에서 3대가 어우러져 산다. 오른쪽 맨 끝 봉우리가 보현봉.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종상 화백(76)의 호는 ‘일랑(一浪)’이다. ‘첫 파도’ ‘큰 물결’이다. 당대의 한학자 월당(홍진표)이 대학 재학시절 지어준 아호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의’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려니 끊임없이 출렁인다. 도대체 가만히 한 자리에 안주하지 못한다. 뭔가 새로움을 찾아 일을 저지른다. 그는 경계를 넘나들며 꽃을 피운다. 동양화니 서양화니 다 부질없다. 그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산다. 아내와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가 한데 어우러져 지낸다. 동네 뒤엔 북한산 봉우리들이 우렁우렁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40년 가까이 살고 있다. 토박이가 다 됐다.

그는 틈만 나면 동네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수굿한 보현봉을 바라보며 씨익! 소 웃음을 짓는다. 영락없이 ‘임금에게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다.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도 단골 코스. 그의 집에서 한 시간쯤 걸린다. 발아래 그의 집과 화실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그곳에서 그는 그가 그렸던 그림들을 곰곰이 반성해본다. “4·19때 난 서울문리대 시위대 맨 앞에 있었다. 미대생이었지만, 유도부였기에 그들을 경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경무대 담장 앞에서 오른쪽 종아리에 총을 맞았다. 경찰이 코앞에서 표적사격을 했다. 앞서가던 동성고 학생들이 잇따라 쓰러졌다. 다리를 질질 끌고 부근의 민가로 피했다.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지만 퉁퉁 부어올랐다. 서울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26일)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난 대학시절 거처가 없었다. 동가식 서가숙, 서울역 염천교 노숙자들 옆에서도 자고, 서울대 유도부 매트에서도 곧잘 숙박을 해결했다. 군사정변이 나던 1961년, 난 국전에 특선했다. ‘장(匠)’이라는 제목이었는데, 대장간에서 웃통을 벗어부친 노동자들이 벌갛게 달궈진 무쇠를 두드리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내 나름 ‘4·19혁명의 메시지’였다. 주위에선 동양화에서 대담한 소재선택을 했다고 평했다. 그 이후 난 거의 4·19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부끄러웠다. 4·19 주역들은 순수했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결코 정치판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이종상은 ‘단박에 깨우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에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결코 ‘점수(漸修)’ 없는 ‘돈오(頓悟)’는 있을 수 없다. 무엇이든 우선 관심과 사랑이 앞서야 한다. 관심은 사랑을 부르고, 사랑은 관계, 즉 인연을 낳는다. 인연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가 햇빛을 보면 역사가 된다. 달빛을 보면 전설이 되고, 별빛을 보면 야사가 된다. 햇빛을 보지 못하면 소문이 되어 사라진다.

이종상은 지독하게 노력한다. 탐구욕과 실험정신이 도저하다. 고등수학, 무기화학, 건축투시학, 동서비교미학, 기철학 등 그림에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파고든다. 치열하다. 한번 잡으면 끝장을 보고야 만다. 원효대사 영정 그림이 그 좋은 예다. 원효대사를 알기 위해 ‘기신론(起信論)’공부에 나섰다가 급기야 동국대에서 철학박사(화가 1호)학위까지 받았다.

“초상과 영정은 다르다. 영정은 ‘우러러보는 인격’이다. 그림자 ‘영(影)’은 실체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고산 윤선도 선생 영정에 4년쯤 매달렸다. 영정은 언제나 막연하다. 생전의 글과 삶을 바탕으로 그 분의 얼굴을 유추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서 윤씨 종친회에 어려운 부탁을 했다. 고산 선생의 부모님 묘를 파서 골상을 볼 수 없겠느냐고. 큰 기대는 안했는데, 뜻밖에 종친회에서 ‘좋다’고 했다. 대단한 후손들이다. 경기도 광주의 500년 전 고산의 부모와 친형 묘소를 파서 골상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옷과 머리카락까지 확인했다. 컴퓨터로 3D합성을 하면 99%이상 정확하다. 앞으로 영정도 이런 식의 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고산 선생은 아버지가 온화한 남방계였고, 어머니가 억센 기질의 북방계였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키가 컸다. 1960년대 중반부터 고구려벽화와 고려불화에 빠졌다. 사람들을 만나면 열정적으로 예찬론을 펼쳤다. 국전엔 노동자소재 그림이 연거푸 3번이나 특선했다. 툭하면 노숙자들 사이에서 스케치북을 들고 생활했다. 그러다가 투서가 들어갔다. 어느 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난)수표 내놓으라’며 고문을 받았다. ‘난 가난뱅이라 수표 같은 것은 만져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돌아오니 온 집안이 난리였다. 그림은 물론, 책갈피와 장판지까지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렇다. 그곳에서 난 ‘근신하는 삶’을 배웠다. 선(善)만이 아니라 악(惡)도 훌륭한 스승이었다.”

이종상은 그림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믿는다. 인간이 목적이고, 예술은 그 수단이라고 여긴다. 삶 속에서 그림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면서 인생을 배운다. 사람과 그림은 하나인 것이다. 그도 20대엔 ‘손’으로, 30대엔 ‘머리’로 그렸다. 40대가 돼서야 겨우 ‘가슴’으로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50대에 올라서자 조금씩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게 됐다.

이종상은 1997년 쉰아홉에 파리 루브르박물관으로부터 생존화가로는 세계 처음으로 초대를 받았다. 병인양요를 주제로 한국과 프랑스 간의 용서와 화해를 표현했다. 최초로 배면조명을 시도했다. 초대형 한지설치벽화(6×71.3m)였는데, 3차례나 앙코르요청을 받았다. 127만 명이 관람했으며, ‘텅 빈 충만의 아름다움’이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루브르에선 영구비치를 요구했지만 거절했다. 당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반환에 난색’을 표한 것에 대한 내 나름의 항의였다.

이종상은 ‘독도 교주’로 통한다. 1977년 화가로서 처음 ‘독도진경 개인전’을 가졌다. 그 후 독도그림을 600여 점이나 그렸다. ‘동도가 수줍어 엎드렸는데, 서도가 고개를 들고 망을 보는 자세’ ‘보라색 안개로 띠를 두르고, 금세 용광로에서 흘러내린 듯한 기암’ 등 그의 ‘독도 묘사 글’도 한 폭의 그림이다.

“우리나라를 풍수로 보면 좌청룡이 독도, 우백호가 강화도 마니산이다. 북현무는 백두산, 남주작은 제주 한라산이다. 요즘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유적을, 일본은 독도를 넘보고 있다. 난 ‘붓으로 싸우는 민병’이다. 관병은 총칼이 필요하지만, 민병은 문화로 스며들어 번진다. 영화 ‘취화선’에도 나오는 ‘몽유취원도’라는 내 그림이 있다. 술에 취해 파안대소하는 원숭이그림이다. 실제 나는 이 그림을 만취한 상태에서 그렸다. 아침에 깨어나 아내더러 ‘당신이 그렸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도대체 누가 그렸지? 내 손을 보니 먹이 잔뜩 묻어 있었다. 비로소 내가 그린 것을 알았다. 그렇다. 그림은 그리는 게 아니라 그려지는 것이다.”  

▼ 돈을 따르지 말고, 돈이 따라오게 하시게 ▼

김은호 김기창 장우성… 화폐 화가 스승들의 ‘돈 철학’

독도에서 붓 대신 손끝으로 지두화(指頭畵) ‘독도진경’을 그리고 있는 이종상 화백. 이종상 화백 제공
독도에서 붓 대신 손끝으로 지두화(指頭畵) ‘독도진경’을 그리고 있는 이종상 화백. 이종상 화백 제공
화폐는 한 나라의 얼굴이다. 민족의 얼과 상징,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들어있다. ‘테라바이트 급의 메모리 칩’이다. 오죽하면 ‘휴대용 압축박물관’이라고 할까. ‘화폐 화가’는 아무나 될 수 없다. 철저하게 사전 검증과정을 거친다. 빚 진 거 없나, 세금 안 낸 거 없나, 정신적으로 이상한 거 없나, 도덕적인 문제 없나 등등. 만일 화가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키면, 그가 그린 화폐는 최악의 경우 전량 폐기해야 한다.

화폐 하나 만들면 30∼50년을 쓴다. 그래서 흔히 나이 지긋한 원로화가가 그린다. 그만큼 실력이 탄탄하고, 살날이 적어 ‘사고(?) 칠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경우 월전 장우성(1912∼2005·백원권 이순신 장군), 현초 이유태(1916∼1999·천원권 퇴계 이황 선생), 운보 김기창(1913∼2001·만원권 세종대왕) 화백이 그 좋은 예다.

이종상은 오천원권(1977년)의 율곡 이이 선생과 오만원권(2009년)의 신사임당 영정을 그렸다. 원래 오천원권은 이당 김은호 선생(1892∼1979)이 그리기로 돼 있었는데,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자 손자뻘인 이종상을 강력 추천한 것이다.

“그 때가 서른일곱, 불암산자락 초가집에서 살던 시절이었다. 화폐화가는 천운을 타고나야 한다는데, 좀 얼떨떨했다. 세 스승(김은호, 김기창, 장우성)이 곧장 나를 불렀다. 그리고 ‘돈’에 대해 한 말씀씩 하셨다. ‘이 순간부터 여태까지의 돈에 대한 생각을 깡그리 바꾸게!’라고 했다. 다소곳이 한 시간 반쯤 무릎 꿇고 들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한마디로 굶어죽으라는 이야기구나’ 생각했다. 첫째 ‘그림 사는 사람을 집으로 끌어들이지 마라’고 했다. ‘어이쿠, 난 가난뱅이 화가인데, 초가집도 바꾸고, 아이들도 가르쳐야 하는데…’ 앞이 캄캄했다. 한 소식 던져주신 것이었는데, 난 아둔해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승들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그 분들은 화가이기 전에 인생 도사님들이었다. 난 그 날 이후 그분들의 말씀을 90%는 지켜왔다고 자부한다. 다음은 그 분들의 심오한 ‘돈 철학’ 강의내용이다.”

1. 돈은 자네보다 귀가 밝네, 눈도 자네보다 훨씬 좋아. 천리안이지. 그러니 돈을 뒤에서 따라가지 말게. 돈은 뒤에서 따라오는 인간을 가장 싫어하네. 돈은 눈귀도 밝고, 생각까지 따르르해서 자네가 그냥 열심히 그림을 그리면, 자네 뒤에서 자네도 모르게 따라오는 거야. 돈은 애완견이나 똑같다네. 사람이 애완견을 쫓아가면 되겠는가. 뒤에 따라오도록 해야지. 강아지는 자꾸 안으려고 하면 도망간다네.

2. 돈은 돈이요, 돌은 돌이네. 돈을 돌같이 보면 그 돌로 남에게 돌팔매질 할 수도 있네. 때로는 굴러다니는 돌을, 임자 없는 돌이라 해서 ‘집어가는 게 임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돈을 돈같이 귀하게 여기게. 부디 돈을 사랑하게나. 행여 돌로 여기지는 말게나.

3. 돈은 살아있는 생물이라네. 유기체지. 돌고 돌아야 하는 거야. 지니고만 있으면 안 되네. 벌고, 모으고, 아끼고, 불리는 게 목적이 아니야. 돈 안 써서 소유하고, 채우기만 해서는 미련퉁이밖에 더 되겠는가. 돈은 ‘잘 쓰라고’ 있는 거야. 모쪼록 요긴하게 좋은 일, 보람 있는 일에 잘 베풀고 나누며 쓰게. 아껴 쓰지 말고, 쓸 데 꼭 쓰시게.

4. 돈을 단순한 종이로 보지 마시게. ‘∼원짜리’라고 하지 마시게. 자네에게 누가 ‘서푼짜리 인간’이라면 듣기 좋겠는가?

5. 돈은 국가 재산이니 보관을 잘 해야 하네. 침을 뱉어서 돈을 세지 마시게. 두 번 이상 구기지도 마시게. 한번 접으면 접는 것이지만, 두 번은 구기는 것이네. 세 번부터는 꼬질꼬질 땟국이 묻는다네. 여러 번 접을수록 가난뱅이가 되는 거야. 부자들 잘 보시게.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가 나오지 않던가.

“화폐 그림을 그릴 때는 그 누구도 보면 안 된다. 화실을 몇 겹으로 문을 잠가놓고 극비리에 그린다. 7개월 동안 남의 문상도 못 간다. 병문안이나, 사고 난 데도 못 간다. 향 피워놓고 날마다 기도한다. 고증이 가장 어렵다. 그게 안 맞으면 거의 완성된 그림도 가차 없이 버려야 한다. 오만원권 신사임당 원화를 그릴 때는 80%까지 되었다가 버린 것도 있다. 우리나라 오만원권은 최고액권이다. 거기에 여성이 나온 것은 영국 호주에 이어 세 번째다. 더구나 예술가다. 자랑스럽다. 오만원권이 나오자 어느 분이 ‘신사임당 얼굴이 주모역으로나 나오면 알맞은 얼굴’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어느 분은 ‘기생 같다’고도 했다. 가슴 아팠다. 원화를 보지도 않고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원화는 어디까지나 원화일 뿐이다. 화폐는 위조방지용 주사선으로 그리기 때문에 원화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눈밑주름, 입술주름, 동정주름 등은 모두 빠졌다. 그 원화는 한국은행 금고 속에 모셔져 있다. 흔히 화폐 그린 화가의 옷깃만 스쳐도 부자가 된다고 한다. 나하고 악수를 하면 돈복이 터진다며 저마다 손을 잡으려고 한다. 그렇다. 내 그림은 대한민국 모든 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니 난 ‘돈심’이다. 모든 국민이 나하고 모두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화폐그림 이후로 난 그 누구도 미워할 수가 없게 됐다. 아니 모든 미움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내가 누구를 미워해 돈심이 그 분으로부터 멀어진다면, 그 분은 어떻게 돈을 벌어 처자를 먹여 살리겠는가. 난 가게에서 행여 구겨진 거스름돈을 받을 땐, 계산대 바닥에 지폐를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몇 번 씩 문질러 곱게 펴서 지갑에 넣는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이종상 약력


△1938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 삼광초-대전 보문중-대전고(1959)-서울대 미대 졸업(1963) △동국대 철학박사(1989) △서울대 동양학과 교수(1991∼2003) △서울대 박물관장 △서울대 미술관 초대관장(2002∼2003)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장, 건축위원장 △서울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재단법인 삼성문화재단 이사 △사단법인 국악진흥회이사장

▼수상 △대학 재학중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3연속 특선(1961∼63) △제1회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 최고특상(1962) △최연소 추천작가(25세·1963) △생존작가 세계 첫 루브르박물관 초대전(1997) △최초 독도진경그림(1977) △은관문화훈장(2003)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2008) △대한민국 건국포장(2010) △가장 문학적인 상 미술인부문(2011)

♠ △오천원권 지폐 율곡 영정(1977) △오만원권 지폐 신사임당 영정(2009)

♣수필집 △화실의 창을 열고(1980) △솔바람 먹내음(1987)

♣현재 △한국벽화연구소장(1968∼)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1977∼) △재단법인 일민문화재단 이사 △재단법인 고촌재단 이사 △국가표준영정동상 심의위원(2003∼) △서울대 명예교수협의회 이사(2003∼) △사단법인 평창문화포럼 이사장(200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2004∼)
#이종상#독도 교주#독도진경 개인전#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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