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영의 영화와 심리학]컴플라이언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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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습관화된 ‘착한 사람 콤플렉스’ 파고드는 악마의 손길

모든 것은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됐다.

패스트푸드 매장 매니저인 산드라(앤 도드)는 다니엘스(팻 힐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경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경찰은 매장 직원이 손님의 돈을 훔쳤다는 신고가 접수됐다고 한다. 그리고 매장에서 주문 받고 있는 직원 중에 금발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마침 그때 매장에서는 금발의 베키(드리마 월커)가 주문을 받고 있다. 베키는 그동안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일도 잘 하던 18세 소녀. 산드라는 베키를 작은 창고 방으로 데려간다.

전화기 너머의 경찰은 산드라에게 당장 베키의 몸을 수색하라고 명령한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당장 몸수색을 하지 않으면 베키를 검거해서 유치장에 가둔 상태에서 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고 울먹이는 베키. 산드라가 몸수색을 주저하자 경찰은 베키를 바꿔달라고 한다. 경찰은 베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소리친다. “체포되어서 유치장에 갇힌 상태에서 조사를 받던지, 아니면 지금 당장 몸수색을 받던지!”

감옥에 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둘은 그 순간부터 전화기를 통해 전달되는 경찰관 다니엘스의 명령에 복종하기 시작한다. 그의 요구에 따라 산드라는 베키가 옷을 모두 벗도록 만든다. 결국 베키는 나체 상태에서 산드라의 몸수색을 받는다. 베키가 돈을 훔쳤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경찰은 베키를 계속 의심한다.

앞치마 한 장으로 몸을 겨우 가리고 있는 베키는 곧 자신의 혐의가 풀릴 거라고 생각한다. 맨몸으로 몸수색까지 받았고, 훔쳤다는 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경찰의 요구사항은 점점 커져만 간다. 베키를 감시하는 사람을 남자로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산드라는 자신의 약혼자 벤(빌 캠프)을 부른다.

산드라를 포함한 여자 직원을 모두 창고에서 내보낸 다니엘스는 벤에게 상상을 초월한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다. 중년의 남자인 벤이 보는 앞에서 베키가 앞치마를 벗게 만들고, 팔 벌려 뛰기를 하라고 지시한다. 몸에 숨겼을지도 모르는 동전이 떨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명령에 벤도 처음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며 머뭇거린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전화기를 통해 전달되는 경찰의 명령에 복종하기 시작한다. 다니엘스는 벤에게 나체 상태인 베키의 엉덩이를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때리라고 명령하기까지 한다. 약 4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이 사건은 결국 성폭행이란 파국으로 이어진다.

공권력에 대한 복종이 부른 비극

크레이그 조벨 감독의 2012년작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는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90분 동안 패스트푸드 매장의 작은 창고 안에서 일어났던 악몽을 냉정하게 기록한다. 매장에 온 손님들이 평화롭게 햄버거를 먹고 있는 동안 바로 옆에 있는 창고 안에서는 성폭력이 이뤄진 것이다. 산드라와 벤은 가짜 경찰이 지시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해 어린 소녀에게 성적 폭력을 가하고, 베키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보이스(voice) 성폭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사건 속 인물들은 마치 패스트푸드 매장의 직원들이 손님의 주문을 받듯이, 경찰을 사칭한 남자의 명령에 따라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18세 소녀에게 참혹한 폭행을 가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명령에 복종했던 사람들이 산드라와 벤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32개 주에 있는 70개의 레스토랑에 이런 전화가 걸려왔고, 그 곳의 매니저들도 전화 속 가짜 경찰의 명령에 복종했다고 한다.

가짜 경찰관 다니엘스는 설득 전문가처럼 체계적으로 상대를 복종시킨다. 황당한 명령에 상대가 머뭇거리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한다. 하나는 자신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둘 중에서 지금 당장 조금 더 편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선택하고 만다. 복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단 명령에 복종하기 시작하면, 가짜 경찰은 마치 ‘문간에 발 들여 놓기’(foot-in-the-door)란 설득기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아주 약한 명령에서 시작해서 점점 명령의 강도를 높여간다. 한 번 감당할 만한 수준의 약한 명령에 따르게 한 다음 점점 요구사항의 수위를 높여서 상대가 복종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산드라와 벤이 자신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머뭇거릴 때마다 가짜 경찰은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당신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한다. 이는 ‘책임감 분산’을 유도한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결국 모든 책임은 전화기 속의 경찰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행위의 결과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수록 사람들은 잔인한 행위도 큰 죄책감 없이 하는 경향이 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악마를 만든다

피해자인 베키는 왜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 것일까. 비합리적인 복종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있다. 이 영화에서 베키라는 이름을 붙였던 실제 사건의 피해자는 심리치료 과정에서 자신이 끝까지 저항하지 못하고 명령에 복종한 이유를 “살아오면서 늘 했던 경험 때문”이라고 답했다. 어른들로부터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들으면서 자랐던 경험이 자신에 대한 폭력을 스스로 수용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착한 사람이 되어야 사랑 받을 수 있다고 배우면서 자란다. ‘울지 말라고 했는데도 우는 아이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다’고 노래한다. 그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산타할아버지조차도 말을 듣지 않는 아이한테는 냉정한 것이다. 말 잘 들어야 착한 사람이고 사랑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만든다.

사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조금씩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거의 본성에 가깝다. 문제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다른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는 걸 어렵게 만든다는 데 있다. 착한 사람은 말을 잘 듣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비합리적인 요구도 당당하게 거절하지 못하게 만든다. 너무 아니다 싶어서 거절하고 나면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복종의 습관이 길러지고, 거절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궁극적으로는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명령도 거절하기 힘들어진다.

복종의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할 수 있다. 거절하거나 저항했다면 쉽게 제거되었을 작은 악의 씨앗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몸집을 키우기 때문이다. 산드라나 베키가 가짜 경찰의 명령을 처음에 단호하게 거절했다면, 이 사건은 장난전화 해프닝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복종의 습관은 때로 작은 악을 통제 불가능한 악마로 성장시킨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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