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멋진 아빠 멋진 남편, 한순간에 와르르…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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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와 심리학… ‘비버’-우울증을 날려버린 월터
속마음 고백할 인형마저 없다면, 일기와 대화할까

영화 속 주인공은 비버 인형의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토해낸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남자를 구해낸 것은 누구의 도움도 아닌 바로 ‘자기감정의 분출’이었던 것이다. 동아일보DB
영화 속 주인공은 비버 인형의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토해낸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남자를 구해낸 것은 누구의 도움도 아닌 바로 ‘자기감정의 분출’이었던 것이다. 동아일보DB
《 이 남자가 하는 일은 하루 종일 자는 것뿐이다. 회사에서도 자고, 차 안에서도 잔다. 온 가족이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가족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는 우울증 환자다. 상담을 받으러 가서도 그는 잔다. 약을 먹고, 심지어는 허리띠로 자신의 등을 때려도 보지만 헛수고다. 조디 포스터가 연출한 2011년 작 ‘비버(The Beaver)’에 등장하는 월터 블랙(멜 깁슨)의 모습이다. 》
우울증이 가져온 불행

과거에 그는 성공적인 경영인이었다. 아버지의 자랑이던 장난감 회사를 물려받아 열정적으로 일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신상품 개발이나 회사를 키우는 일엔 아예 관심이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이 무가치하게만 느껴진다. 덕분에 회사도 파산 직전이다. 과거에 그는 멋진 가장이기도 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였다. 하지만 이젠 가족을 위해서는 없는 게 더 나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월터가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면서 망가진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 모두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초등학생인 막내아들 헨리(라일리 토머스 스튜어트)는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의 대상이 됐다. 아내 메레디스(조디 포스터)도 우울증에 빠지기 직전이다. 월터를 과거의 멋진 남편으로 돌려 보려던 그녀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가 됐고, 남편 대신 가장의 역할까지 떠맡았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월터의 우울증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큰아들 포터(안톤 옐친)다. 그는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생이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신도 언젠가 아버지처럼 갑자기 우울증 환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힘겹게 한다.

포터는 자신과 아버지의 공통점을 하나씩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 놓는다. 그것들을 하나씩 없앨 계획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공통점은 49가지. 49번째 공통점은 아버지를 증오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증오했듯이 포터는 월터 같은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게 너무 끔찍하고 부끄럽다. 아내와 큰아들은 월터가 가족으로부터 떼어내야 할 암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결국 월터는 쫓겨나듯 짐을 꾸려 집을 떠난다. 그가 처음 들른 곳은 편의점. 거기서 양주를 한 상자나 산다. 트렁크에 술을 싣다가 우연히 발견한 비버 모양의 손 인형. 한때는 인기 있던 장난감이었지만, 이제는 우울증에 걸린 자기처럼 축 처진 모습이다. 모텔로 향한 그는 술에 취해 자살을 시도한다.

억눌린 감정을 폭발시켜라

남자들의 심리적 불행은 대부분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남자들은 자신의 속마음과 감정을 억압하도록 교육받으며 자란다. ‘남자다워야 한다’는 사회의 요구사항에는 ‘마음의 통증을 드러내지 말라’는 실천사항이 포함돼 있다.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아파도 웃으면서 가족과 회사를 위해 묵묵히 일할 때 비로소 남자답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월터도 한때는 그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남자였다.

하지만 멋진 남자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바로 정신 건강이다.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양의 ‘마음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각자가 가진 마음 에너지의 양은 제한돼 있다. 감정을 억누르는 데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다른 스트레스에 대처할 힘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결국 강인했던 남자가 작은 사건 하나에 허무하게 쓰러지는 일이 발생한다. 멀쩡한 사람이 제3자가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에 크게 상처받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은 스트레스조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의 면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유일한 해법은 무겁게 짓눌린 감정의 문을 열어주는 것뿐이다.

월터가 모텔의 난간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가 “이봐!”라고 외친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월터는 뒤로 넘어져 버린다. 자살 시도는 일단 실패. 월터를 부른 건 그의 왼손에 끼워져 있던 비버 인형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월터 본인이 인형을 통해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이다. 인형극 연기자들이 손 인형을 움직이면서 대사를 하듯이 말이다. 그는 비버 인형을 출구로 삼아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한마디 말도 없이 멍한 눈으로 축 늘어져 있던 월터는 사라져 버린다. 비버의 입을 통해서 수다쟁이처럼 떠들기 시작한다. 수다는 그에게 활력을 되찾아준다. 월터가 생기를 되찾자 회사에도 활기가 돈다. 가족도 다시 웃음을 찾는다. 비버가 말하기 시작하면서 월터와 그의 주변이 다 함께 밝아진 것이다.

나만의 방법을 찾아보자

월터는 다행히 비버 인형을 통해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인형이 모든 사람에게 답이 될 수는 없다. 사실 월터에게도 비버가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아내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도 월터의 왼손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와 함께 숨을 헐떡이는 비버의 모습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다.

감정의 문을 열기 위해 비버 인형 대신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미국 텍사스대의 사회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일기 쓰기’를 제안한다. 그는 다수의 연구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일기에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줄고 신체적인 건강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일기에 자신의 분하고 억울한 감정을 털어놓았던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던 학생들보다 6개월 동안 건강 관련 문제로 학교 보건소를 찾거나 질병에 걸린 횟수가 적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기 쓰기는 심지어 관절염과 천식 증상까지 완화시켰다. 일기라는 나만의 ‘대나무 숲’에서 억압된 감정의 문을 가끔씩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에너지가 얼마든지 재충전되는 것이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 wooyoung@cnu.ac.kr
#O2#영화와 심리학#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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