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의 ‘한시 마중’]<40>세밑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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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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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립니다. 눈으로 고생하는 분이 많기는 하지만 농사짓는 분이라면 기쁨이 앞섭니다. 중국 속담에 ‘섣달에 세 번 눈 오는 것 보면, 농부가 껄껄하고 웃는다(臘月見三白 田公笑(하,혁)(하,혁))’라고 하였습니다. 유방선(柳方善·1388∼1443)은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부친이 역모에 몰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습니다. 이 작품은 영천의 유배지에서 자유의 몸이 되기 조금 전에 쓴 시입니다. 함께 지은 두 번째 시에서 “한 해가 저무는데 타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 나그네 회포와 고향 생각이 둘 모두 아득하다. 뜰 가득한 바람과 눈 속에 사람 소리 들리지 않는데, 한 점 등불이 나그네 시름을 비추네(守歲他鄕不自由 旅魂鄕思兩悠悠 滿庭風雪無人語 一點靑燈照客愁)”라고 하였으니, 그 고단한 신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섣달 눈이 휘날려 하늘에 가득합니다. 벌써 세 번째 눈이 내렸는데 그래도 싫지 않은 것은 이것이 풍년이 들 조짐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상은 아직 한겨울이지만 하늘은 봄인지라 활짝 배꽃이 피었고 이것이 지상에 떨어진 것이 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덕에 유방선이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8세기 문인 서명응(徐命膺)은 새해를 맞을 무렵 규장각에 이런 글을 붙였습니다. “섣달에 세 번 눈이 내려서, 풍년으로 사방이 편안하기를. 팔백년 주나라 왕업도, 천 개 만 개의 창고에서 실로 힘입은 것이니(臘雪徵三白 풍年綏四方 從來八百業 實賴萬千倉)”. 한 나라나 정권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섣달에 세 번 눈이 내리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시#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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