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의 ‘한시 마중’]<38>매화 그림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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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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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같으면 방 안에서 난방기구를 끼고 앉아 있을 뿐 바깥으로 나가기 싫습니다. 그래도 방 안 화병에 꽃 한 송이 꽂아두면 좋겠습니다. 혹 여의치 못하면 꽃그림으로라도 대신하십시오. 17세기 위항의 시인 최기남(崔奇南)이 그러하였습니다.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자 가난한 최기남의 집은 속세와 단절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리 나쁠 것이 없습니다. 호젓하게 그림 속의 매화를 벗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보노라면 매화를 완상하고 소매 가득 꽃향기를 담고서 눈 덮인 길을 거닐던 젊은 시절을 상상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누워서 노닌다고 하여 이런 풍류를 와유(臥遊)라 하였습니다. 와유는 가난한 사람도 즐길 수 있는 방편입니다.

그림으로 와유하는 것도 좋겠지만 최기남처럼 가난하지만 맑은 정신을 지녔던 분이라면 매화 화분을 무척 갖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매화 화분의 값은 결코 녹록지 않았기에 가난한 사람이 즐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보다 나중에 지은 시 ‘겨울날 서재에서(冬日書齋)’에서 “적막한 뒷골목길이라 찾아오는 이 없는데, 언 구름 훤한 눈이 뜰 귀퉁이에 어른어른. 청허(淸虛)가 과연 배를 채워 주림을 잊게 하기에, 주역(周易) 읽는 책상머리에 늙은 매화 두었다네(窮巷寥寥客不來 凍雲晴雪映庭외 淸虛果腹忘飢渴 讀易床頭有古梅)”라고 한 것을 보면 드디어 최기남이 매화 화분을 하나 구했나 봅니다. 최기남은 매화가 뿜어주는 청허(淸虛)로 배를 채울 수 있었기에 밥 대신 기꺼이 매화를 택하였겠지요. 이런 맑음이 부럽습니다.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시#매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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