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규 교수와 함께 한 대륙 속 우리문화 흔적을 찾아서]<4>허난성 뤄양시 龍門석굴의 ‘신라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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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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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까, 세계유산 룽먼석굴에 석굴 하나 더한 신라인은…

중국 허난 성 뤄양 시의 룽먼석굴(세계문화유산)에 신라인이 조성한 동굴 ‘신라상감’을 6월 26일 찾은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는 “동굴 입구 위쪽에 새겨진 ‘新羅像龕’ 네 글자가 1000년이 넘는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한중 교류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며 “앞으로의 한중 교류도 상호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처럼 굳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뤄양=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중국 허난 성 뤄양 시의 룽먼석굴(세계문화유산)에 신라인이 조성한 동굴 ‘신라상감’을 6월 26일 찾은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는 “동굴 입구 위쪽에 새겨진 ‘新羅像龕’ 네 글자가 1000년이 넘는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한중 교류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며 “앞으로의 한중 교류도 상호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처럼 굳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뤄양=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중국 허난(河南) 성 뤄양(洛陽)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약 13∼14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룽먼(龍門)석굴. 이허(伊河) 강을 가운데에 두고 서쪽과 동쪽 산기슭에 1km씩 조성된 수많은 석굴과 불상은 그 방대한 규모와 예술적 조형미로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북위 효문제(孝文帝)가 낙양에 도읍을 정한 시절(493년)부터 조성된 이곳의 동굴은 무려 2300여 개, 불상은 10만여 개에 달한다. 동굴은 북위 시절에 3분의 1가량, 당나라 시절에 나머지 대부분이 조성됐다.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
[1] 중국 당 태종의 무덤 소릉에서 발견된 신라 진덕여왕 석상의 하반신. [2] 건릉 주변 장회태자묘의 벽에 그려져 있던 ‘예빈도’ 진품.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신라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산시성박물관에 있다. [3] 건릉에 세워져 있는 61국인 석상 중 한인 석상.
[1] 중국 당 태종의 무덤 소릉에서 발견된 신라 진덕여왕 석상의 하반신. [2] 건릉 주변 장회태자묘의 벽에 그려져 있던 ‘예빈도’ 진품.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신라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산시성박물관에 있다. [3] 건릉에 세워져 있는 61국인 석상 중 한인 석상.
한국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이곳에 당나라 시기 한민족이 조성한 석굴 ‘신라상감(新羅像龕)’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룽먼석굴 관광지 정문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면 작은 샘물인 진주(珍珠)천이 나오고, 그 샘물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왼쪽 위편에 신라상감이 있다. 안내도에도 ‘新羅像龕’(신라상감)이 표시돼 있다. 하지만 샘물 옆의 작은 계단을 따라 10m쯤 올라가야 하기 때문인지 6월 26일 현장을 찾았을 때 신라상감을 관람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 현장법사-원측 부도탑 한곳에

석굴 입구의 위쪽에는 ‘新羅像龕’이라고 음각된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동굴 입구의 높이와 폭은 각각 1.2m 내외, 깊이는 2m가량 돼 보였다. 석굴 안 세 개 벽면에는 불상이 새겨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입구 앞에 설치한 중국어 안내문에는 ‘제484호 굴로 신라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 안에는 현재 불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신라상감은 여느 석굴과 마찬가지로 승려들이 불법을 수행(修行)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룽먼석굴에는 관심을 끄는 수많은 동굴과 불상이 있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신라상감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펑셴(奉先)사 불상의 경우 높이가 17.4m, 불상 귀의 길이만 1.9m에 달한다. 반면 높이가 4∼5cm에 불과한 불상이 빼곡히 새겨진 작은 동굴도 많다. 룽먼석굴 관광지 입구에서 만나 함께 신라상감을 보게 된 경남대 중국학부의 김종민 씨(24)는 “취재진을 만나지 않았으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며 “1300년쯤 전에 우리 민족의 손길이 여기까지 뻗쳤다고 생각하니 놀랍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수학 중인 김 씨는 방학을 맞아 같은 대학 선후배와 함께 룽먼석굴을 찾은 길이었다.

서울에서 약 1400km 떨어진 이곳에 신라상감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인물은 신라 승려 원측(圓測·613∼696)이다. 신라의 왕손으로 3세 때 출가를 하고 15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장안과 낙양에 머물면서 여러 법사로부터 불법(佛法)을 배웠다.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인 현장법사가 천축(현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고 종합해 유식사상(唯識思想·마음 외에는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마음에 의하여 모든 것이 창조된다는 사상)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당나라뿐만 아니라 티베트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그가 지은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원측의 부도탑은 시안(西安) 시 창안(長安) 구 싱자오(興敎)사에 현장법사의 부도탑과 함께 세워져 있다.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 등 6개 언어에 능통했다고 알려진 원측은 당 측천무후의 요청에 따라 인도 불경의 번역 사업 책임자를 맡을 정도로 당에서 유명했다. 신라 신문(神文)왕이 여러 차례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지만 측천무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박현규 순천향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룽먼석굴의 많은 굴이 당나라 때 생겼다는 점, 측천무후의 요청으로 역경 사업을 벌일 정도로 원측의 이름이 높았다는 점, 특히 그가 여든을 넘겨 입적했을 때 그가 다비(茶毘)된 장소가 룽먼석굴 관광지 안에 있는 향산사의 북쪽 계곡이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신라상감을 조성한 인물은 원측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시안 시 창안 구 싱자오사에 있는 원측 좌상.
시안 시 창안 구 싱자오사에 있는 원측 좌상.
그러나 원측 외에도 신라상감의 주인공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또 있다. 당시 신라와 당의 교류가 활발해 양국을 오간 승려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신라의 국사(國師)가 된 무염(無染·801∼888)도 신라상감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거론된다. 신라 왕손 출신인 그는 낙양에서 오랫동안 불법을 수행했다. 당나라에서 이름을 얻어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로 불릴 정도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훗날 중국이 선(禪)을 잃으면 장차 동이(東夷)에게 묻게 될 것’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이처럼 한국과 중국 간의 교류는 중국 대륙의 한복판인 중원(中原)까지 미쳤다. 낙양과 시안과 같은 중원에는 승려와 공식 사신들의 발길이 잦았다. 이런 신라인들이 중원에 남긴 흔적은 특히 2000년대 들어 발견된 유물로 인해 학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 61국 석상 중 1개는 韓人 석상

박 교수는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에 있는 당 고종의 능인 건릉(乾陵)에 세워져 있는 61국인 석상 중 1개가 한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2007년 밝혔다. 2002∼2003년에는 산시(陝西)성고고연구소와 소릉박물관 발굴조사팀이 당 태종의 능인 소릉 북사마문 일대에서 신라 진덕여왕의 이름이 들어 있는 좌대 파편을 발굴했다. 1982년에 하반신만 발견됐던 이 좌대의 석상이 진덕여왕임이 확실해진 것이다. 건릉에 속한 묘 중 하나인 장회태자묘(章懷太子墓) 벽화 중 ‘예빈도(禮賓圖)’에도 신라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61국인 석상 중 신라인 상은 건릉으로 가는 길의 동쪽에 세워져 있다. 61국인 석상은 당시 당나라에 오가던 사신들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에 29기, 서쪽에 32기가 세워져 있다. 현재 머리 부분은 모두 훼손되고 없는 상태다.

이 중 동쪽 석상군의 마지막 줄에 홀로 세워져 있는 한인 석상은 왼손에 한민족이 특히 잘 다루는 활을 들고 있고, 삼국시대 신라인들의 옷차림에서 볼 수 있는 3벌 복장을 갖추고 있다. 3벌 복장은 위층, 중간층, 아래층 등 3겹으로 옷을 입는 방식으로 현장에서 본 신라인 석상은 다른 석상들과 옷의 층위가 뚜렷했다. 이런 3벌 복장은 소릉 주변에서 발견된 진덕여왕의 하반신에도 또렷이 남아 있고, 예빈도의 신라 사신도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있다. 학계에서는 예빈도의 사신이 고구려인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3벌 복식이 신라만이 아닌 삼국시대의 특징이라는 주장도 있어 정확한 고증을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박 교수는 “룽먼석굴의 신라상감이나 61국인 석상, 예빈도 등에서 삼국시대에도 한중 간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개방적인 태도에 바탕을 둔 이런 상호 교류는 당나라를 경제·문화적으로 융성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가 약 1000년간 존속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었다”고 말했다. 현재와 미래의 한중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양국이 새겨야 할 부분이다.

이어 박 교수는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시안과 뤄양의 대표적인 관광지에도 한국과 관련된 문화유산이 많다는 사실이 중국 학계의 발굴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며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 학계뿐만 아니라 국내의 여러 전공 학자들의 협업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시안·뤄양=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허난성#석굴#신라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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