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규 교수와 함께 한 대륙 속 우리문화 흔적을 찾아서]<3>산둥성 펑라이市의 펑라이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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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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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한국 古선박, 한중 바닷길 교류 생생 증언

펑라이수성의 누각에서 바라본 수문(水門). 왼쪽으로 보이는 물길이 바다와 연결되는 수로로 수문을 나와 곧장 나가면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닿는다. 성 안쪽에 보이는 물은 항구로 활용되는 곳으로 한국 고선박은 이곳에서 나왔다.
펑라이수성의 누각에서 바라본 수문(水門). 왼쪽으로 보이는 물길이 바다와 연결되는 수로로 수문을 나와 곧장 나가면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닿는다. 성 안쪽에 보이는 물은 항구로 활용되는 곳으로 한국 고선박은 이곳에서 나왔다.
《 5월 18일 중국 산둥(山東) 성 북부 해안에 자리한 작은 도시 펑라이(蓬萊) 시에서는 ‘해상 실크로드와 펑라이 고선박 및 등주(登州)항’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학술대회에는 이원식 원인(元仁)고대선박연구소장, 김병근 홍순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박순발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등 한국 전문가를 비롯한 한중일 학자들이 참석했다. 한국 학자들이 참석한 것은 2005년 7월 펑라이수성(水城) 안의 옛 항구 갯벌에서 고려 말∼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배 2척과 명나라 배 1척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우리 전통배가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첫 사례다. 중국 측도 이 고선박의 발굴에 고무돼 펑라이수성 안에 ‘펑라이고선(古船)박물관’을 새로 짓고, 개관을 약 한 달 앞둔 학술대회 기간에 참석자들에게 이를 미리 공개하는 행사를 열었다. 》
펑라이수성 안 옛 항구자리 갯벌에서 발굴된 한국 고선박 펑라이 3호(위 사진 앞쪽)와 명대 선박인 펑라이 2호. 한국 고선박은 명대 선박보다 바닥이 평편하고 주로 소나무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펑라이고선박물관에 새로 세워진 포은 정몽주 석상(아래).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왼쪽)와 홍순석 포은학회 부회장(강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 펑라이를 세 번이나 방문한 포은의 행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펑라이수성 안 옛 항구자리 갯벌에서 발굴된 한국 고선박 펑라이 3호(위 사진 앞쪽)와 명대 선박인 펑라이 2호. 한국 고선박은 명대 선박보다 바닥이 평편하고 주로 소나무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펑라이고선박물관에 새로 세워진 포은 정몽주 석상(아래).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왼쪽)와 홍순석 포은학회 부회장(강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 펑라이를 세 번이나 방문한 포은의 행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펑라이 3호선과 4호선으로 명명된 한국 고선박은 배 밑바닥이 약간 평편한 ‘U’자형으로 배 밑바닥이 ‘V’형인 명나라 배인 펑라이 2호선과 확연히 구별된다”고 말했다.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나온 펑라이 3호선의 침몰 시기는 1373∼1409년경, 선박의 극히 일부분만 나온 펑라이 4호는 그보다 좀 뒤에 침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펑라이에는 어떤 역사적 사연이 있기에 약 600년 전의 우리 배가 바다 밑 갯벌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것일까.

펑라이수성이 있는 곳은 예로부터 천혜의 항구였다. 나선형으로 꼬인 듯한 해안선이 먼 바다의 높은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펑라이수성에는 육지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성문과 배를 타고 직접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성문이 모두 갖춰져 있다. 저장(浙江) 성의 동쪽지역이 신라와 고려시대에 한반도와 중국 대륙 중심지를 이어준 교역지라면 펑라이는 신라와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시대까지도 한국과 중국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산둥 반도는 서해 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대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둥 대석문화유적(大石文化遺跡)의 지석묘와 랴오둥(遼東)과 한반도에서 나온 지석묘는 닮은꼴이다. 이를 볼 때 신석기시대에 이미 산둥 반도 동단과 한반도 사이에는 해양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를 비롯한 많은 재당 신라인들이 산둥의 해안지역에 신라촌을 짓고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할 정도로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장보고가 세운 신라인의 불교사찰 법화원(法華院)이 대표적인 교류 흔적이다.

신라인 김청(金淸)은 9∼10세기 초반 산둥에 거주하면서 한반도와 저장 성 동쪽 지역을 잇는 삼각무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 산둥 성 원덩(文登) 시 제스(界石) 진의 사찰 무염선원(无染禪院)에는 김청에 관한 기록이 담긴 ‘당무염선원비’(901년 건립) 일부가 남아 있다. 물자교역으로 큰 부를 축적한 김청이 무염선원을 중창할 때 지역의 유력한 인물로 불탑 건립에 기여를 했기 때문에 남은 기록이다. 그러나 이 비는 여러 개로 쪼개진 채 현재 무염선원이 속해 있는 무염사풍경구 관리원들 숙소의 벽돌로 사용됐다.

펑라이수성을 관리하는 기관인 펑라이거(蓬萊閣)가 5월 18, 19일 개최한 ‘해상 실크로드와 펑라이 고선박 및 등주(登州)항’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
펑라이수성을 관리하는 기관인 펑라이거(蓬萊閣)가 5월 18, 19일 개최한 ‘해상 실크로드와 펑라이 고선박 및 등주(登州)항’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
한중 교류의 역사 속에서 펑라이는 등주(登州)로 등장한다. 신라와 당, 고려와 송의 많은 사람들이 14세기 말까지 등주를 거쳐 한반도를 오갔다. 그러다가 명 홍무제(1328∼1398)의 해금정책과 영락제(1360∼1424)의 북경 천도로 등주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해로는 중단됐다. 그로부터 약 200년 뒤인 17세기 전반에 후금이 요동을 차지함으로써 한중 교류에서 육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등주는 다시 한중 교역의 주요 항구 역할을 하게 된다. 등주가 마지막으로 한국과 중국, 즉 조선과 명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 기간은 1621∼1637년이었다.

항해로는 한반도의 평안도에서 요동 남단 해역과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거쳐 산둥의 등주로 가는 길이 주로 이용됐다. 조선시대 항해 기간은 평안도 선사포(宣沙浦)에서 등주까지 통관절차 등을 포함해 약 22일이었다. 통상 4∼6척의 배가 함께 오갔고, 각 선박에는 40∼80명이 탔던 것으로 보인다.

항해로는 험난했다. 1621년 해로 사행에 나섰던 조선 사절은 갈 때는 육로로 연경까지 갔지만 귀국 무렵에는 후금이 요동을 차지하는 바람에 등주에서 배를 이용해 귀국길에 올랐다. 이들은 요동반도 남단 노철산(老鐵山)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 사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익사하는 조난사고를 당했다. 이어 1626년에도 선박 한 척이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1627년에는 선박 두 척이 침몰돼 관원과 뱃사람 79명이 익사했다. 조난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나자 조선 조정에서는 해로 사행의 사신으로 차출되는 것을 꺼리는 풍조가 생길 정도였다.

펑라이를 통한 한중 교류의 인연을 가진 역사적 인물도 많다. 고려 말기 정몽주, 이숭인, 권근, 박의중 등이 있고, 조선 건국 초기에는 이첨, 이직 등이 있다. 펑라이고선박물관에는 정몽주의 석상도 있다. ‘고려 말의 정치가이자 학자이자 문학가였던 정몽주는 4번 중국으로 오면서 3번을 펑라이를 거쳐 갔다’는 내용이 동상 설명문에 쓰여 있다.

박현규 순천향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펑라이에서 발견된 한국 선박은 기록으로 존재하던 한중 교류의 역사를 실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며 “한국 고선박과 정몽주 석상이 함께 전시된 펑라이고선박물관은 관광을 위해 펑라이수성을 찾는 현대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한중 교류 역사의 깊이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역사적 소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펑라이·원덩=글·사진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산둥성 펑라이#펑라이수성#바닷길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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