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사람]이성용 베인앤드컴퍼니 한국대표와 김우중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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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MBA 청년, 한국산 ‘닥치고 경영’에 한방 먹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겨울이 막 시작되려는 1990년 11월의 미국 보스턴.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이름 모를 기업가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학생들을 위해 강연을 하러 왔다. ‘대우’라는 기업의 창업자라고 자신을 밝힌 50대 기업가는 유창하지는 않은 영어로 강연을 이어갔다. “앞으로 중국과 인도의 중산층이 구매력이 생길 때를 대비해야 한다”라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시각을 제시했다. 세계화가 제대로 논의되기도 전이었지만 세계 경영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이 기업가가 유독 2가지를 반복해 강조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말끝마다 “열심히 일하고 희생하면(hard working and sacrifice) 안 될 것이 없다”고 했다. 강연이 끝난 뒤 “대우의 전략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도 “열심히 일하고 희생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28세의 청년 이성용(현 베인앤드컴퍼니 한국대표·51·사진)에게 기업가 ‘김우중’(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일종의 충격에 가까웠다. 다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학생들도 김우중에게 열광했다. 한국이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런 ‘무데뽀’ 기업가 정신에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당시 세계무대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감이 없다시피 했다. 이성용의 하버드대 MBA 동기 중 한국인은 단 3명이었다. 그나마도 그를 포함한 2명은 재미교포였다. 수업 시간에 배우는 아시아 기업의 사례는 일본 소니 아니면 도요타가 전부였다.

첫 번째 만남

이성용은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우주공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인의 꿈을 키웠던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모든 일에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규율에 맞춰 실행해온 그에게 김 회장의 언행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열어줬다. 이성용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강의에 이어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장과 김 회장과의 식사 자리에도 초대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도 김 회장은 “이성용 군,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앞으로 아시아의 시대가 올 겁니다. 이 군은 머리도 좋으니 열심히 일하고 희생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2세 때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로 이민을 간 이성용은 어릴 때부터 백인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1970년대 덴버에는 한국인이 드물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불리한 배경을 극복하고 주류 사회에 편입해야 했다.

육사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역사상 한국인 중에서는 3번째로 미국 육사에 입학했다. 동기 중 한국인은 당연히 없었다. 육사에 입학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미국 시민권이 있어야 하고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여자 생도가 입학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입학 후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도 심했다. 특히 그가 입학한 1980년대 초는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미국은 중국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동료 학생들에게 동양인 사관생도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들은 체력 테스트를 할 때면 턱걸이나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카운트를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 3번 하면 1번으로 쳐주는 식이었다. 공부는 공부대로 운동은 운동대로 이를 악물고 따라가야 했던 그 시절에 대해 이성용은 “고문 빼고는 다 받아본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에게는 살면서 가장 힘든 때였다.

하지만 열심히 버티니 좋은 결과가 있었다. NASA에서 우주인이 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NASA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을 했다. “전공(우주공학)이 맞아떨어진 것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우주인 후보를 뽑을 때 동양인이나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있었어요.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인생은 정말 새옹지마였다. 이성용은 갑작스럽게 나빠진 시력 탓에 우주인 후보에서 탈락했다. 많이 아쉽지는 않았다. 우주인이 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지만 그 확률이 아주 낮았다. 설사 우주인이 된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우주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살고 싶지 않았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사고가 일어나자 우주인 선발 예산은 대폭 축소됐다. 미련은 쉽게 버려졌다.

그는 비즈니스로 눈을 돌렸다. 국방부 소속 조달담당으로 일했다. 미 국방부는 엄청난 투자규모 때문에 미국의 항공산업과 정보기술(IT) 산업을 이끄는 큰 축 중 하나로 꼽힌다. 이성용은 외부 컨설턴트들과 함께 일을 하곤 했는데,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과 하는 일은 별 차이가 없는데 임금은 2배, 3배로 많았다. 그와 같은 공대 출신도 많았다. 그는 MBA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세계를 다니며 주로 인수합병(M&A) 프로젝트와 관련된 컨설팅을 했다. 김 회장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대로 살았던 셈이다.

두 번째 만남

1995년 당시 이성용이 몸담고 있던 컨설팅업체 AT커니가 한국 지사를 열기로 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 있다가 지시를 받고 홀로 서울에 왔다. 한국말도 서툴고 서울 지리도 몰랐다. 지사를 차리려면 많은 게 필요한데 그는 심지어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김 회장의 ‘무데뽀’ 정신이 떠올랐다. 그는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의 호텔로 들어올 때 탄 모범택시 운전사에게 자신의 기사가 돼 줄 것을 부탁했다. “기사님, 택시 하지 마시고 제 운전기사 안 하실래요?” 신라호텔 컨시어지 담당 여직원에게는 자신의 비서가 돼 달라고 했다. 그러고 사무실을 하나 얻어서 일을 시작했다. 포스코와 SK텔레콤, 그리고 대우가 고객사가 됐다.

대우는 당시 내놓은 신차들인 누비라와 라노스, 레간자를 미국에 수출하는 프로젝트를 이성용에게 맡겼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김우중 회장을 만났지만 김 회장은 이성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번뜩이는 사업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대표, 요즘 그 인터넷이라는 거 있잖아. 그걸 많이들 하더라고. 그걸 통해서 차를 팔면 어떨까 생각해 봤는데, 이 대표 생각은 어때?” 당시는 1990년대 중반으로 인터넷 초창기였다. 전자상거래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김 회장의 감각에 이성용은 또 한번 깜짝 놀랐다.

하루는 업무 관련 회의를 하기 위해 서울역 앞의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빌딩)을 찾아갔다. 김 회장은 해외에 나가고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의 방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성용도 덩달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무려 3일 동안 대기해야 했다. 대우는 회장이 없으면 아무것도 결정을 할 수 없는 조직이 돼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속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김 회장이 워낙 해외에 자주 나가는 탓에 한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휴대전화가 일반화되기 전의 시절이었다.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았던 기업가의 조직 운영 능력은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이성용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느끼는 것도 많았다. 일단 부딪쳐보는 기업가 정신도 중요하지만 회사가 일정 규모 이상 커졌을 때는 조직을 운영하는 인사·조직 관련 능력, 시스템적인 사고가 매우 중요해진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둘 사이의 균형점이 어디일까를 고민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7년 말, 한국에 외환위기가 터졌다. 원-달러 환율은 2000원까지 치솟았고 주가는 폭락했다. 국내 대기업 간의 빅딜(대규모 사업 교환)이 화두가 될 때의 어느 날, 이성용은 한국을 방문한 잭 웰치 당시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을 수행할 일이 생겼다.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웰치 회장이 그에게 던진 첫 질문은 “한국이 어떻게 될 것 같나”였다. 그는 “한국이 망할 것 같다”고 당시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웰치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아무것도 없이 나에게 와서 팔씨름 한번 이기고 GE와 합작투자 법인을 세운 사람입니다. 한국에는 정 회장처럼 럭비공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망할 것 같지만 결코 망하지 않을 겁니다. 한국은 이상하게도 그런 살아가는 힘이 있는 나라입니다.”

세 번째 만남?

이후 10년이 넘게 흘렀다. 요즘의 한국은 정반대다. 시스템이 좋아졌고 기업들의 조직 운영 능력도 향상됐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을 가진 기업가들은 줄어들고 있다. 모두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 게다가 규제가 많아서 안 되는 것은 또 너무 많다.

이성용은 “한국인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이 강한 것도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단점을 비판한 ‘한국을 버려라’(2004년)와 한국의 좋은 점에 대해 쓴 ‘한국을 찾아라’(2005년) 등 두 권의 책을 잇달아 출간했다. 그중 ‘한국을 버려라’가 2배 이상 더 많이 팔렸다.

이성용은 김우중을 두 번 만났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는 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실망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지도 이제 15년이 넘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만약에 김 회장을 세 번째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2’를 쓰고 젊은이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불어넣어 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이성용은 말한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살아있는 기업경영의 롤 모델이 없어요.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정주영과 이병철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롤 모델이 없다는 증거예요. 2세와 3세 기업인들은 아무리 잘해도 제대로 인정받기 힘듭니다. 창업자와는 다르거든요. 김우중 회장이 잘못한 점도 있지만 기업을 공격적으로 키우고 세계를 무대로 열심히 경영을 한 것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성용 대표가 겪어본 황당 한국기업 ▼

■ 컨설팅 자문료로 2억어치 라면을… “팔면 현금” 설명까지


한국말이 서투르다고 재떨이가 날아왔다. 피했다. 왜 피하냐며 이번에는 신발이 날아왔다. 항상 욕이 난무했다. 1990년대 한국 기업 오너들의 힘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막강했다. 실제로 오너에게 얻어맞은 컨설턴트 얘기도 들었다. 서양식 경영이 한국 기업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던 때였다. 이성용은 1990년대에 외국계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황당한 사건을 적잖이 겪었다.

외환위기 당시 현금이 부족했던 한 식품기업은 “컨설팅 피(Consulting Fee·자문료)로 라면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라면에도 유통기한이 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해당 기업은 “라면을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현금화할 수도 있다. 돈하고 똑같다”라고 말했다. 금에 투자하듯이 라면을 갖고 있으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2억 원어치 라면을 보관할 만한 넓은 장소가 없었다. 이성용은 “보관도 해주면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결국 자문료를 라면으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어에 서툰 이성용이 가장 어려움을 느꼈던 부분은 한자였다. 대기업 보고서에는 알 수 없는 한자가 너무 많았다. 한번은 참다못해 중국에서 컨설턴트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컨설팅 문서를 중국어로 작성하게 했다. 중국어 문서를 보고 놀란 대기업 임직원들은 보고서 안의 한자 비중을 줄여줬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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