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조각난 평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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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0일 월요일 맑음. 전쟁과 평화.
#331 Bill Evans ‘Peace Piece’(1959년)

‘Peace Piece’가 실린 앨범 표지.
‘Peace Piece’가 실린 앨범 표지.
“만나본 음악가 중 누가 제일 인상적이었나요?”

곧잘 받는 질문이다. 다양한 인터뷰이가 뇌 주름 가득 먼지처럼 들어앉아서일까. 명료한 답이 얼른 나오지 않는다. 단, 몇몇 장면만은 사진처럼 또렷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3년 전, 미국의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케빈 컨을 만났을 때. 사진 촬영을 위해 피아노 앞에 앉은 그가 내게 물었다.

“혹시 지금 이 순간 듣고 싶은 곡이 있나요?”

반사적으로 ‘My Funny Valentine’이라 답했다. 그가 곧장 그 테마에 의한 즉흥연주를 시작했다. 흑백의 건반을 더듬는 손끝으로 그는 그날 어떤 풍경을 본 걸까. 겨울비 내리는 오후였다.

며칠 전, 비 내리던 날에 택시를 타고 서울 내부순환로를 달렸다. 무채색 방음벽 위로 녹색 산자락이 휙휙 지나가는데 마침 헤드폰에서 ‘Peace Piece’가 흘렀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1929∼1980)의 곡.

‘Cmaj7-G9sus4.’ 왼손으로 끝없이 반복하는 단 두 개의 코드는 흡사 에리크 사티의 ‘짐노페디’처럼 군다. 음표의 동양적 행간. 그 위로 에번스의 오른손은 목가적 멜로디를 구름처럼 띄운다. 녹음 당시 스튜디오에서 에번스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Some Other Time’을 연주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다 문득 자석에 끌린 듯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전개해나간 것이 ‘Peace Piece’라는 창작곡이 돼버렸다. ‘콘서트 때 그 곡을 해 달라’는 주문을 평생 받았지만 에번스는 거절했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에만 오롯이 존재한 곡’이라는 이유에서다. 단 한 번, 6분 44초간 일어난 음악적 사건인 셈이다. 하지만 청자에게는 재생할 때마다 다른 환상을 보여준다.

평화롭게 진행되던 멜로디는 중반에 접어들며 까탈을 부린다. 에번스는 불협화음들로 이뤄진 선율 무더기를 괴팍한 새털구름처럼 흩뿌리며 음악의 하늘을 몽환적 노을빛으로 물들여버린다. 평화는 방사성 동위원소처럼 시나브로 붕괴해간다. 격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음들. 그러나 그 행진은 파국이 아닌 회귀일지도. 자연의 어지러운 녹색을 향한.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bill evans#peace 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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