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전진만 가능한 체스판의 졸개 ‘폰’… 우리도 소망의 저편에 다다를 수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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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 만나는 詩]

체스판 양 끝에 도열한 두 무리의 군대. 그 최전선에는 동그란 머리를 가진 졸개 ‘폰’이 가지런히 열병해 있다. 동양 장기의 졸(卒)에 해당하는 이 말은 앞으로밖에 나갈 수 없지만 맞은편 체스판의 끝에 도달하면 주교나 기사로 변신할 수 있다. 보통 다음 수를 위해 희생되는 이 졸이 과연 소망해 온 저편 끝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이달에 만나는 시 2월 추천작은 손미 시인(32·사진)의 ‘폰(Pawn)’이다. 200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의 첫 시집 ‘양파공동체’(민음사)에 실렸다. 제3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이기도 하다. 추천에는 김요일 손택수 이건청 이원 장석주 시인이 참여했다.

‘폰’은 시인이 서양장기 체스에서 8개가 한 벌을 이루는 졸개 말에서 시상을 떠올려 쓴 시다. 시인은 “한정된 판 위에서 오직 전진만 가능하고 대각선에 있는 상대 말만 공격할 수 있는 법칙에 매여 있고, 그 법칙을 벗어나면 즉시 반칙이 되는 운명의 폰이 우리 삶의 모습과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인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번 시집엔 ‘체스’나 ‘체크 메이트’, 또는 ‘죽은 말은 다시 사용할 수 없다’처럼 체스에서 길어 온 듯한 시 제목이 유난히 자주 눈에 뜨인다.

3연의 “그리운 것은 언제나 지평선 아래 있습니다”라는 구절에 대해선 “평소 북극을 동경했고 유리로 만든 폰에서 얼음 이미지를 떠올려 시 속에서 폰의 목적지를 북극으로 삼았는데, 정작 소망한 곳에 도달해도 소망해 온 대상과 만날 수 없는 슬픔의 정서를 드러내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천위원인 김요일 시인은 “경쾌한 리듬, 투명하지만 깊은 상처로 아프게 버무려진 이 시집 속의 파편들은 우리가 아직 냄새 맡지 못한 우리 시의 새로운 미학으로 오래 전시될 것이다”라고 평했다. 손택수 시인은 “파악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파악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미지의 영역으로 자신을 추방한 자의 시선이 외따롭다. 시는 늘 변경으로부터 변경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생생해진다는 걸 알겠다”고 평했다.

장석주 시인은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을 추천하며 “나희덕의 시들은 항상 맑고 담담하다. 담담함은 신산고초를 다 끌어안고 삭이며 스스로 깊어짐의 결과인데, 이 담담함에 모성의 지극함과 여성의 다감함이 겹쳐져 깊이를 만든다”고 썼다.

이건청 시인은 강해림 시인이 7년 만에 낸 세 번째 시집 ‘그냥 한번 불러보는’(시인동네)을 추천하며 “소멸됐거나 파멸된 것들 속에서 근원을 투시해내는 강한 정신을 만난다. 그리고 현격하게 다른 층위의 이미지들이 결합된 시편들이 돌발적 광휘를 창출해 보여준다“고 했다.

이원 시인의 선택은 신경림 시인이 6년 만에 낸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이었다. “그 흔한 비유나 수사 하나 없는 간명한 시편들이다. 이 ‘순진무구’로 가난과 과거를 복원시킨다는 점은 더 경이롭다. 시인의 맥박과 언어의 박동 수가 늘 일치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폰#손미#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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