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나는 詩]사물은 너에게 바라는게 없으니 남은 온기라도 마음껏 가져가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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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굽은 늙은 목수의 손때 묻은 연장 가방에서 ‘와르르’ 연장이 쏟아져 내린다. 목수와 함께 나이를 먹으며 반질하게 닳은 가죽 가방의 지퍼가 연장의 무게, 아니 세월의 무게를 못 이기고 뜯어져 버렸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고통스럽게 입을 쩍 벌린 지퍼를 여며 쥐고 가방을 쓰다듬는 목수의 손길이 마치 아픈 자식을 어루만지는 듯하다.

2014년 이달에 만나는 시 첫 추천작은 정진영 시인(46·사진)의 ‘어느 가방의 죽음’이다. 2004년 ‘문학사상’에 등단한 지 9년 만에 펴낸 첫 시집 ‘중환자실의 까뮈’(시인동네)에 수록됐다. 추천에는 손택수 이건청 이원 장석주 김요일 시인이 참여했다.

‘어느 가방의 죽음’은 시인의 남동생을 모델로 해 쓴 시다. 한옥을 짓는 목수, 도편수란다. 시인은 “사물이나 물체에도 생명력과 영혼이 깃들어 있고 그 영혼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물활론(物活論)을 믿는데, 10년 20년을 끌고 다닌 가방과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면 그 가방도 주인의 인생과 많이 닮아 있을 거라는 데서 착안한 시”라고 했다. “남은 온기라도 마음껏 가져가라”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사물은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없이 그 자체로 빛나는데, 사람만 사물에 바라는 게 많지 않나. 그동안 한 번도 주인에게 바란 것 없는 가방을 떠나보내는 목수의 애잔함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추천위원인 이건청 시인은 “정진영 시집은 비근한 대상들을 깨뜰고 무너뜨리고 나서 낯설게 마주하게 된 것들을 불러낸다. 어둠과 우울조차도 전혀 다른 질량의 것으로 호명되어 견고한 구조를 이뤄낸다”고 평했다. 김요일 시인은 “낮고 불안한 목소리로 생의 비극을 노래하지만 ‘서툴게 빛나던 그때’를 기억해 내고 ‘스스로 반짝이는 법’을 통해 시 속에서 꿈꾸고 춤추고 환생(幻生)하며 세상을 건넌다”고 말했다.

이원 시인은 윤병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고단’(문학과지성사)을 선택하며 “두 번째 시집을 내기까지 꼬박 13년이 걸렸다. 그 결과 생활에 ‘살맛’을 저미는 내공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손택수 시인의 선택은 윤제림 시집 ‘새의 얼굴’(문학동네)이다. “세상에는 웃음으로 싸우는 시인도 있다. 맑고, 기발하고, 사물의 정면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는 힘까지 갖춘 웃음은 어떤 제도 권력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마지막 생명의 진지다. 이 웃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신을 주물러 주리라.”

장석주 시인은 이성미 시집 ‘칠일이 지나고 오늘’(문학과지성사)을 권했다. 추천사는 이렇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안에서 무너지고 분리되는 그 무엇이 있다. 타자의 호명에 부응하기 위하여, 혹은 의미의 규정에 대답하기 위하여! 이성미의 시들은 ‘빈칸의 형식’에 불과한, ‘재처럼 희미한’ 오늘의 지리멸렬을 더듬으며 삶의 최저 낙원에서 그것의 의미화를 집요하게 모색한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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