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들며/안정희]천국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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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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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희 시나리오 작가·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안정희 시나리오 작가·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인천공항에 총천연색 깃털을 머리에 꽂은 그들이 나타났다. 큰 키에 원색 옷, 촘촘히 땋아 올린 새까만 머리와 새까만 눈동자, 뱉어내는 이상한 언어들. 시선을 사로잡는 그들은 아프리카 투르카나 부족민들이다.

고아였던 그들을 20여 년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친 선교사님을 따라 꿈에 그리던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들은 생전 처음 바다도 보고, 회라는 것도 먹어보고, 한강 유람선도 타보고, 63빌딩 뷔페에서 200가지가 넘는 음식도 구경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담아 오라는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그들은 고작 닭다리 세 개만 담아 왔다. 평생 옥수수죽만 먹어 온 그들에게 닭다리는 뷔페 최고의 음식이었나 보다. 떠나기 며칠 전, 일산 호수공원에서 그들은 말했다. “천국에 온 것 같다”고.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천국 같은 호수공원 앞에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작가님이 산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대박도 아니고 중박도 아니고 평타 정도라도 칠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인 나에게, 그 작가님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분이다. 그런데 그 작가님이 깊은 우울함에 빠졌다. 날개 달고 날아다녀도 모자랄 판에 깊은 우울이라니. 이 무슨 가당치 않은 감정의 유희인가 싶지만 작가님은 자못 심각하다. 아름다운 호수공원을 등진 채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입는 수면바지를 피부처럼 느끼며 주야장천 노트북 앞에 앉아 계신다. 딱히 글을 쓰지는 않는다. 포털사이트 뉴스는 왜 이렇게 늦게 업데이트되는지. 주말 예능프로에 나온 국카스텐 동영상은 왜 자꾸 끊어지는지를 생각하고, 인터넷 쇼핑의 경이적인 할인상품이 진짜 경이적인 할인상품인지를 비교 검색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손은 당장은 필요 없지만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쓰게 될 가능성이 0.0001% 정도 되는 경이적인 할인상품을 끝내 사고야 만다. 끝 모를 깊은 한숨을 클릭하며 마지막 결제를 끝낸다.

보르헤스는 천국이 있다면 도서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중고교생들은 이 말에 비명을 지른다. 도서관에서 그들은 늘 시험공부를 한다.

투르카나 부족민들은 대한민국이 천국이라 말했다. 나는 투르카나 부족민들도 대한민국에 눌러 살면 언젠가 우리와 같은 깊은 우울함에 빠질 거라 확신한다.

어떤 이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얼른 포털사이트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를 검색해 본다. ‘가난’을 뜻하는 헬라어는 두 가지. ‘페네스(Penes)’와 ‘프토코스(Ptochos)’. ‘페네스’는 가난하지만 일을 하면 먹고살 수 있는 상대적 빈곤이고, ‘프토코스’는 뭘 해도 먹고살 수 없는 절대적 빈곤을 뜻한다. 투르카나 부족민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느끼는 가난은 페네스적 가난, 즉 상대적 빈곤이다. 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에 쓰이는 가난은 절대적 빈곤을 뜻하는 ‘프토코스’다.

마음의 절대적 빈곤? 그건 아마도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텅 빈 공간, 때론 깊은 우물 같고 때론 블랙홀 같은 그곳, 아프리카 투르카나 부족민이든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작가든 다 가지고 있는 텅 빈 그곳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것을 인정하고 깨닫고 고백하는 데서 천국이 시작된다고 한다.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의 프토코스를 채우려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단, 인터넷 쇼핑은 절대 금지!

안정희 시나리오 작가·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찻잔을 들며#안정희#투르카나#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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