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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O2/안지훈의 빈티지 특강]유럽 구두장인의 수십년 혼 깃든 도구들 구입했을 때의 짜릿함

입력 2011-08-13 03:00업데이트 2011-08-2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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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구입한 한 구두 장인의 도구들. 불가리아 이민자인 이 장인은 부친의 뒤를 이어 50년 넘게 구둣방을 운영했다고 한다. 단단한 무쇠 부속과 반질반질한 손잡이가 연륜을 짐작하게 한다. 안지훈 씨 제공
스웨덴에서 살 때다. 주말마다 열리는 동네 벼룩시장에 각종 공구와 작은 공작기계들을 가지고 나오는 노인이 있었다. 그의 좌판에는 대장장이가 제대로 두드려 만든 무쇠망치에서부터 면도칼을 가는 데 쓰는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혁지(革砥·가죽숫돌), 얼핏 보아도 몇십 년은 되었을 법한 전동 톱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스웨덴 남자들은 무엇인가 직접 만지고 고치는 데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노인의 좌판은 언제나 필요한 도구를 찾는 남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노인은 조금이라도 더 쓸 수 있는 도구라면 무엇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손을 보아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했다. 나는 기회가 날 때마다 그의 좌판을 서성였다. 반짝반짝 손때가 묻은 공구들을 볼 때의 그 기분이란…. 나는 낡은 공구들의 강한 생명력과 이끌림에 매료됐다.

벼룩시장 노인의 좌판은 아주 긴 시간을 사람과 함께 살고 늙어온 도구의 친밀감과 아름다움에 대한 첫 번째 경험을 선사해 줬다. ‘잘생긴’ 물건이 태어나는 데 힘을 보탠 도구들의 숨은 가치와 역할을 생각해 볼 고마운 계기도 얻었다.

○ 불가리아 노인의 구두 제작 도구

몇 년 전이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골목을 지나다 골동품 가게를 발견했다. 가게 앞 진열대에 투박한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연륜이 느껴졌다. 단단한 무쇠 부속과 반질반질한 나무 손잡이의 퍼티나(patina·오래된 목재나 가죽 표면에 생기는 그윽한 색)가 눈길을 끌었다. 어딘가에 걸어두고 썼는지 투박한 가죽고리가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주인 남자는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귀에 대고 말했다. “내가 알고 지내던 늙은 구두 장인이 쓰던 도구들이라오.” 길 건너편에 2대에 걸쳐 구둣방을 하던 노인이 있었단다. 기력이 떨어진 노인이 가게 문을 닫게 되자 골동품상에서 공구를 가져왔다고 했다. 골동품상 주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새로운 가게가 들어오는지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었다.

손때 묻은 도구들은 그 주인이 경험한 수많은 사연과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구두 장인이 가죽을 신발 밑창에 고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수십 년의 사연을 간직한 그 도구들을 꼭 내 손에 넣고 싶었다. 그렇게 나란히 진열되어 있던 공구 네 점을 모두 구입했다. 물건 파는 것보다 그 물건에 관심을 갖는 낯선 동양인에게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은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길 건너편에서 50년 넘게 구둣방을 운영했다는 그 노인에 대해 더 해줄 이야기는 없나요?”

골동품상 주인은 자신도 가게를 연 지 몇 년이 안 되었기 때문에 아주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노인은 불가리아 출신의 이민자였으며,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를 물려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가업을 이어갈 자식이 없었다. 골동품상 주인이 알고 있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손때 묻은 도구들은 50년 동안 노인이 경험했을 수많은 사연과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노인의 아버지가 이 도구들을 썼다면 그 사연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반질반질한 손때와 떨어져 나간 가죽고리는,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늙은 구두 장인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 실용성과 연륜의 미학

우리는 보통 도구 앞에 ‘쓸모 있는’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물론 ‘쓸모’는 도구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다. 하지만 도구나 공구는 그 나름대로의 미학을 가지고 있다. 철저한 실용성과 기능성을 기반으로 한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이다. 여기에 연륜과 사연이 덧붙여지면 그 아름다움은 더욱 커진다. 오랜 세월 동안 주인 곁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했던, 그리고 주인과 삶의 여러 순간을 함께했던 도구야말로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래서 아름다운 도구가 되기 위한 조건은 까다롭거나 특별하지 않다. 우리 삶의 크고 작은 기억을 공유한다면, 우리들의 인생만큼이나 그 도구들도 충분히 아름다울 자격이 있다. 신발장 문을 열고 찾을 수 있는,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참 오랫동안 우리 집에 있었던 쇠망치, 아버지가 손수 챙기시던 공구함과 그 속에 들어 있는 자그마한 경첩, 이가 빠지고 녹이 슬었지만 아직도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는 톱, 할머니가 쓰시던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가위….

여하튼 사람의 손길이 닿았던 도구는 모두 아름답다.

디자인 마케터 helsinki@plus-ex.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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