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이 사는법]사회인 야구팀 강타자-투수 이재식 씨 ‘야구야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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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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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에 이룬 어릴적 꿈

이재식 씨가 야구 복장과 장비를 갖추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선수의 면모를 보여야 한다”며 안경까지 벗었다. 지적이던 눈이 순식간에 매섭게 변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이재식 씨가 야구 복장과 장비를 갖추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선수의 면모를 보여야 한다”며 안경까지 벗었다. 지적이던 눈이 순식간에 매섭게 변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찬정자왕가는 ‘정자왕’을 찬양하는 노래다. 신라 향가 ‘찬기파랑가’가 모티브다. 정자왕은 기사의 주인공 이재식 씨(41)의 별명.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시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사는 야구왕이란 뜻이니까. 이 시는 그가 올해 8월 4이닝을 1피안타로 막은 후 논술학원 강사인 팀 선배(김은종 씨)가 써줬다. 상대는 리그 우승 경력에 팀 전체 타율이 0.380이나 되는 강팀이었다.

이 씨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제철소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사람이다. 사회인 야구 경기 횟수(월 2∼3회)에 만족하지 못해 평일 날 매일 새벽에 모이는 조기야구회에도 가입해 활동한다.

1면 소년은 투수가 되고 싶었다


1980년 경북 월성군 양남면(현 경주시 소속). 국민학교 5학년 소년은 야구가 그렇게 좋았다. 한 팀을 꾸리기에도 부족한 동네 아이들과 늘 집 마당에 다이아몬드를 그리고 야구 놀이를 했다. 그의 포지션은 언제나 투수. 이상무 화백이 그린 ‘아홉 개의 빨간 모자’ 주인공 독고탁처럼 고독한 승부사가 되고 싶었다.

인근 나아리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러 온 캐나다 기술자들이 있었다. 소년은 우연히 그 자녀들의 야구경기를 보게 됐다. 노란 유니폼을 입고 파란 풀밭을 뛰는 모습이란. 언제가 나도 저렇게 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가 꿈을 이루기까지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좀처럼 야구를 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다 2009년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그가 경영하는 온라인 만화 콘텐츠 회사(씨앤씨 레볼루션)가 입주하면서 일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몇 달 동안 사람을 모으고 고교 선배인 이현세 화백을 구단주로 모셨다. 2010년 4월, 만화인들로 이뤄진 사회인 야구팀 ‘마나스’(올해는 시화군자리그 참가)가 탄생했다.

2면 가냘픈 몸매지만 101km 강속구

이 씨는 분당 조기야구회의 ‘정상급 투수’다. 구속은 시속 101km. 프로선수보다는 못하지만 일반인 중에서 공이 빠른 사람이 시속 80km인 점을 고려하면 무시 못할 속도다.

그는 올해 분당리그에서 47과 3분의 1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4.73을 기록했다. ‘핸드볼 스코어’가 자주 나는 사회인 야구에선 대단한 기록. 타자 261명을 상대해 피안타 82개, 홈런은 1방만 맞았다. 현재까지의 기록은 4승 4패 1세이브.

그의 특기는 절묘한 제구력이다. 4사구가 2이닝에 1개 나올 정도. 타자를 잡을 때도 제구력을 바탕으로 맞혀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인 야구에선 선수들이 공을 치고 싶어 엄청 근질근질해 하거든요. 유인구를 던지면 대부분 배트가 돌아갑니다, 하하.”

얼마 전 선수 출신으로부터 구속을 높이려면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거나 체중을 늘리라는 충고를 받았다. 신장 172cm인 이 씨의 몸무게는 59kg밖에 되지 않는다. 체중을 늘릴 거냐고 물으니 “현재의 제구력에다 구속만 조금 빨라지면 삼진을 좀 더 많이 잡을 것 같다. 그렇지만 살이 잘 안 붙는 체질이라 고민”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 잘 던지는 이가 잘 친다


그는 처음엔 타격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투수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투수도 타격을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배트를 들었는데 의외로 결과가 좋았다. “투수를 하다 보니 타격 감각이 절로 생기더군요.” 그러면서 이 씨는 10여년 전 자신의 모교 경주고에 패배를 안긴 부산고 이야기를 꺼냈다. “추신수 선수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더군요. 에이스 투수에다 4번 타자였거든요.”

그의 타율 이야기를 듣고는 “당신이 사회인 리그의 추신수 아니냐”란 말이 나올 뻔했다. 경인지역 리그인 시화군자리그에서 그가 올해 거둔 성적은 타율 0.460. 팀에서 두 번째 성적이다. 그는 18경기(경기가 보통 5이닝 정도에 끝나 경기당 평균 2.5회 타격 기회)에서 안타를 21개 쳤다. 4개월 이상 리그 타격 1위였지만 아깝게 최다 안타 타이틀을 놓쳤다. 최근의 중국 출장과 상대팀의 경기 포기(2경기)로 안타를 추가할 기회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시화군자리그에선 타격에 집중하느라 투수로서 실점이 많았다. 그는 평균자책점 공개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3면 나는 야구가 정말 좋다


그를 보면 야구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그렇게 오래 참았을까 싶다. 왜 야구가 좋은지를 물었다. “목표의식이 생겨서 좋아요. 운동을 위해 술도 적게 마셔 좋고요. 여러 전문가가 분업과 협업을 통해 뭔가를 이뤄간다는 점도 마음에 들어요. 아, 사업요? 의도한 건 아닌데 같은 일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니 업무 협조에 도움이 되지요. 작가분들한테 원고 받기도 수월해지고. 개인적으론 데이터를 쌓아가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기록을 쌓고 이뤄가는 맛이라고나 할까요. 야구는 기록 빼면 재미없잖아요.”

그는 지금도 야구만 생각하면 설레고 흥분된다고 한다. “설레는 느낌요? 아, 장난 아닙니다. 비 올까 조바심이 나 잠이 안 올 정도예요. 선수 출신을 어떻게 잡을까 궁리하다 보면 정말 즐겁습니다.”

‘4회 제한 안타깝다’는 시의 내용은 현재 분당리그에서 선수들의 균등한 출전 기회 보장을 위해 1인당 4회까지만 투구를 허용하기 때문에 나왔다.

대화 내내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듬뿍듬뿍 묻어났다. 나이 마흔에 ‘어릴 적 첫사랑’을 다시 만난 이 사내. 그 사랑이 불혹을 넘은 나이에도 20대 못지않은 활기와 에너지를 끌어내는 듯했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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