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 답한다]조선시대 과거 응시엔 빈부귀천 차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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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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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최근 출간된 연구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는 조선시대에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과거시험에 대거 합격해 조선이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였음을 통계로 보여주었다(본보 23일자 A21면 참조). 다른 전근대 국가들과 비교하면 조선사회의 신분적 개방성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나? 또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공부에 몰두하기 어려운 여건이었을 텐데 어떻게 과거에 합격했을까? 》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근대 이전에 정치엘리트인 관원을 과거시험을 통해 선발한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교 국가뿐이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나라는 한국 중국 베트남뿐이다. 유교 국가가 아닌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다. 세 나라 가운데 베트남은 중국이나 한국처럼 지속적으로 과거가 시행되지 못했다,

유교 국가에서 과거제도를 실시한 데는 폭력적인 무인정치를 공익과 도덕을 지향하는 문인정치로 바꾸려는 목적이 담겼다. 그래서 시험에서 평가하는 내용도 정치의 공익과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 경전의 정신이 중심을 이뤘다. 물론 직업적 전문성을 요구하는 기술직 관원, 예를 들면 의관 역관 천문관 화원 등의 시험은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테스트했다.

미국에서 활발하게 연구된 중국의 과거제도는 평민의 신분 상승을 활발히 촉진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과거제도에 주목하여 평민이 문인(literati)으로 상승하고 문인이 관원으로 상승하는 사회임을 인정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통계적 연구가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과거제도에 대한 연구는 이상하게도 신분사회의 폐쇄성을 주장하는 시각에서 진행되어 왔다. 인구가 많은 대성(大姓)에서 급제자가 많이 배출된 사실을 가지고 소수의 성관(姓貫·성씨와 본관)이 관직을 독점한 것처럼 오해했고, 시험 준비에 필요한 경제력을 지나치게 의식한 것이다. 특히 응시자의 경제력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의 엄청난 교육비를 염두에 두고 바라본 것이다.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응시자는 대부분 향교를 비롯한 학교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학생이었지만, 학생들은 농번기에 방학하여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교육을 받아 농사와 글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관립학교는 학비가 없었고, 서원도 학비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계(契)를 통한 상부상조의 재원은 흔히 있었다.

학업의 성취가 경제력과 비례하는지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시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인재를 선발할수록 오히려 가난하거나 학력이 없는 사람은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독학한 사람도 응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학력이나 나이에도 전혀 제한을 두지 않았다.

양반만이 부유하여 응시가 가능하고, 평민은 모두 가난하여 응시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증거가 없는 억측이다. 양반이라고 다 부유한 것도 아니고, 평민이라고 모두 가난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급제자들 가운데에는 가난하고 신분이 천하다고 알려진 인물이 무수히 많았고, 장원급제자 중에도 신분이 낮은 자가 적지 않았다.

과거제도를 시행한 한국과 중국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신분이동이 매우 역동적인 사회였고,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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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과거 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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