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20세기 블랙 vs 21세기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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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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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에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색이 존재한다.” 이브 생로랑

유유상종. 사자성어엔 일종의 통계적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와 친한 A 씨와 나와 친한 B 씨는 서로 잘 어울릴 거라 믿는다. 그러니 내 절친 A를 절친 B에게 소개했을 때 백아절현(伯牙絶絃·진정으로 친한 벗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말함)의 조짐은 기대조차 안 했다. 그저 다음 만남 때 밥을 먹을까, 술을 마실까 고민하는 정도의 흥분과 소란은 기대했다. 인접한 업계에서 일하는 두 절친은 성격도, 취향도 매우 비슷했다. 그러나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두 사람은 막대자석의 S극과 N극처럼 등을 맞대고 있다가 황황히 헤어졌다. 이런 날 나는 정말 슬프다.

절친 A가 이브 생로랑이고 절친 B가 톰 포드일 수도 있을 거다. 이브 생로랑(1936∼2008)과 톰 포드(1961∼)는 꿈속의 내 절친들이다. 이브 생로랑이 1960, 70년대 모더니즘의 태양왕이라면 톰 포드는 지금 최고의 스타다. 007 마니아들이 혹평을 한 영화 ‘스카이폴’을 보며 나는 여러 번 숨이 넘어갔다. 톰 포드를 입은 대니얼 크레이그라니! 톰 포드의 슈트를 입은 007 앞에서 까불 수 있는 악당은 세상에 없다. “더블오세븐, 어쨌거나 슈트는 끝내주네!” “총을 겨눌 때 조심해 주게. 톰 포드거든.”

나의 절친 이브 생로랑과 톰 포드 사이엔 공통점이 많아도 너무 많다. 둘 다 정식 패션 교육을 받지 않고 20대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혜성형’ 천재이고 이브 생로랑은 프랑스인, 톰 포드는 미국인이지만 둘 다 정신적으론 유러피언이어서 미국 패션을 하격(下格)으로 쳤다. 그들 각각은 20세기와 21세기에 가장 탁월한 색채감각을 가진 디자이너로 꼽히면서도 지독하게 ‘검은색들’을 탐닉했다. 이브 생로랑은 “블랙에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색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 옷이 그 옷인 시커먼 옷들만 왜 자꾸 사들이냐는 엄마에게 나는 이 말을 전했다가 딱 전집 50권 분량의 잔소리를 들었다.
구치의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는 오너인 마우리치오 구치가 갈색을 좋아해서 자주 충돌했는데, 그가 무사했던 건 자신의 블랙 드레스와 블랙 슈트가 전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는 쌓이는 카드청구서에 ‘쇼핑라마단’을 선포했다가도 광채를 발하는 구치의 검은색만 보면 부글부글 끓는 욕망의 불 항아리 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이브 생로랑과 톰 포드, 나 ‘우리’ 셋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장례식에서든 돌잔치집이든 까만 옷자락을 휘날렸던 흑장미 클럽 멤버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 두 남자는 똑같이 까만 뿔테안경 마니아에, 게이다.

그런데 현실의 둘은 서로 안 보고 살았다. 톰 포드는 이브 생로랑을 존경한다고 말했지만 이브 생로랑은 톰 포드를 혐오했다. 미국의 상업적 속물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기성복 라인을 따로 만든 이브 생로랑만큼 대중의 취향을 컬렉션에 잘 반영하고 예술을 마케팅에 활용한 디자이너는 없다. 이브생로랑 기성복에 영입됐던 톰 포드가 ‘나는 장사꾼’이라고 위악을 부렸을 뿐이다.

“나는 대중이 원하고, 소비하고, 버릴 것을 디자인한다.”

이브 생로랑이 톰 포드를 비난했던 건, 젊은 그에게서 평생 부인해왔던 이브 생로랑 자신의 재능과 욕망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라고 상상해본다. 거울 앞에 돌아와 선 자신의 모습이, 생존한 디자이너로는 처음 메트로폴리탄에 초대될 만큼 지고한 예술가의 얼굴이 아니라 패션을 투기꾼들이 침 흘리는 글로벌산업으로 바꿔놓은 수완가의 그림자였던 건 아닐까.

이브 생로랑과 톰 포드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두 사람 모두 사랑하고 존경한다. ‘이 한줄’로 이브 생로랑의 말을 선택한 건, 그저 말은 그가 더 멋지게 했기 때문이다.

holden@donga.com  

消波忽溺 쇼퍼홀릭에게 애정을 느끼며 패션과 취향에 대한 글을 씁니다.
#이브 생로랑#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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