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보석같은 내 몸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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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옷을 입혀줘요, 영원히.” 메릴린 먼로

“큰지 작은지 입어보면 알거 아니에요. 고객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 내가 뚱뚱하다는 말이야?”

‘뚱. 뚱. 하. 다’는 단어가 블랙홀처럼 소란을 빨아들였다. 이건 ‘쇼핑학적으로 옳지 않은’ 표현이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격렬하게 흔들리는 압력솥 뚜껑의 추처럼 보였다. 디자이너 A의 부티크에서 벌어진 사달이었다. A는 작아도 너무 작은 옷을 놓고 고민 중인 손님에게 팔이 꼭 붙는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이때, A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을 ‘너는 뚱뚱하다’는 신호로 손님은 해석한 거였다.

패션과 쇼핑업계만큼 가학과 자학의 장르 문학이 풍요롭게 펼쳐지는 곳도 없다. 옷은 몸이라는 물리적 매체 위로 미끄러지는 천과 실 다발에 불과(!)하지만 옷을 입히는 디자이너와 옷을 입는 사람 사이엔,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매우 농밀한 감정이 순간 형성된다. 서로 몸을 마주해야 하며, 어떤 비밀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돈 많고 권부에 있는 자도 피팅룸에 들어가 옷을 벗으면 몸에 관한 자학의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우리 바깥양반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우. 그런데 내 뱃살은 물러날 줄 몰라요) 완벽해 보이는 패션모델조차 거울 앞에서 신의 실수를 원망한다.(사실 저는 허리가 길어요)

타인의 몸에 대한 비평은 정치적 견해나 종교적 신념만큼 위험하다. 디자이너라면 고객의 탄력 없는 근육이나 목주름에 눈길도 주어서는 안 된다. 플라톤 철학에 대해 한 줌의 지식조차 갖고 있지 않아도, 디자이너는 ‘우연히’ 늙고 비만해진 고객의 몸통 너머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몸은 물론이고 영혼까지 빛나게 할 수 있는 옷이 실제로 존재할까. 환풍구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던 흰색 드레스, 턱시도 입은 신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트로피처럼 도도했던 푸크시아 핑크 드레스, 그리고 투명한 천에 크리스털만 박아 넣은 누드 드레스. 올해 사망 50주기를 맞아 열린 메릴린 먼로 회고전에서 바로 그 옷들을 보았다. 조용한 전시실에서 그것들은 주인 잃은 텅 빈 천이 아니라, 살아있는 메릴린, 훼손되지 않은 영혼으로 보였다. 스튜디오에 갇혀 일생을 보낸 그녀는 한 신(scene)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드레스를 입기 전엔 몇 번씩 관장을 했고, 그 ‘비법’을 자랑했다. 그녀는 당시 할리우드의 천재 디자이너였던 윌리엄 트라비야를 찾아 ‘옷 좀 갈아입겠다’고 했다. 관념적 아름다움의 현신. 뮤즈는 자신의 누드 사진에 ‘사랑하는 트라비야, 내게 옷을 입혀줘요, 영원히!’라고 써 보냈고, 디자이너는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여성주의적 전략과 육체적 매력을 극대화해서 번갯불 같은 세기의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그 휘황한 빛에 남성 중심적 세계는 균열을 드러내곤 했다. 예를 들면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파티에서 ‘해피 버스데이 투 미스터 프레지던트’를 부르는 순간. 메릴린은 트라비야에게 자신의 몸을 다이아몬드 그 자체로 보이게 할 드레스를 요구했다. 디자이너는 대통령을 질투했을까. 누드 드레스는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무엇보다 케네디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했다. 생의 막바지에 이른 서른여섯 뮤즈는 이후 트라비야와 마주치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 일주일 뒤 죽었다.

메릴린 먼로를 좋아하지도 않으며, 더구나 드레스 따위 아무 관심도 없다고 말하는 남자들이 회고전에서 홀린 듯 먼로의 옷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잊는다. 감각으로 감지되는 가볍고 덧없는 아름다움이 절대적 미를 계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아름다움’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holden@donga.com  
消波忽溺 쇼퍼홀릭에게 애정을 느끼며 패션과 취향에 대해 씁니다.
#패션#쇼핑#메릴린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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