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현장 체험]어린이프로그램보조출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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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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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 NG!식은 땀 줄줄… 손짓하나까지 볼 줄이야

“벗으세요. 제가 갈아입혀 드릴게요.”

옷을 받아든 내게 그녀가 말했다. 순간 당황해서 그녀의 눈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마음을 바꿨다.

“그럼 저는 나가 있을 테니까 갈아입고 나오세요.”

25인승 버스 안. 엷게 틴팅(선팅)된 유리창으로 가로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밖에서 누가 볼까 두려워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려 옷을 하나씩 벗었다. 그리고 조연출이 준비해준 경찰복으로 재빠르게 갈아입었다. 옷이 조금 큰 것 같았으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고 버스에서 내리자 그녀의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머물렀다.

“주머니에 뭐 넣으셨죠? 촬영 끝날 때까지 제가 맡을게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다 됐어요. 방송 출연은 처음이신 거예요?”

“네. 엄청 떨리네요.”

나의 첫 방송 출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 지구대에서 출동?

24일 오후 8시 반 경기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에 위치한 한 아파트 놀이터. EBS ‘TV로 보는 원작동화- 오총사협회’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연출을 맡고 있는 이호 PD를 비롯해 스태프 30여명이 약 한 달 후 방송될 14회분을 찍는 중이었다. 커다란 조명이 제일 꼭대기층인 13층에서 놀이터를 밝히고 있었다.

‘오총사협회’는 동진 지승 방혁 다인 예석 등 초등학교 4학년 5명이 용돈 인상을 요구하며 놀이터에 텐트를 쳐 놓고 시위를 벌이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내게 주어진 역할은 ‘경찰2’였다. 늦은 밤 텐트 앞에서 아이들이 동진이의 아빠를 낯선 사람으로 오해하고 냄비 등으로 때리는 모습을 보고 경찰도 ‘흉악범’으로 오인해 그를 제압하는 역할이었다.

경찰복으로 갈아입고 촬영장 한쪽에서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지구대에서도 와 있구먼.”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 세 명이 지나가며 하는 말이 들렸다. 오른쪽 허리에 매달린 무전기와 한쪽 손에 든 곤봉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진짜 경찰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어르신들이 조금만 더 가까이 와 유심히 봤다면 내가 가짜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진짜 경찰과 달리 상의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 ‘연속성’이 중요하다

“자, 경찰들 준비해 주세요.”

오후 10시가 조금 넘어서야 드디어 경찰 등장 장면의 촬영이 시작됐다. 경찰 1역을 맡은 성찬호 씨(48)와 함께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 섰다. 5년 전부터 연기를 시작한 그는 현재 KBS 월화드라마 ‘동안미녀’에서 ‘남자 이사’ 역할로 고정 출연하고 있다.

“어, 잠깐만요. 저쪽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요.”

감독님이 즉석에서 만들어준 대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성 씨는 “호흡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뛰어온 것이니 대사가 아니더라도 거친 호흡을 통해 이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 두 번의 리허설이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본촬영이 시작됐다. 감독님의 지시에 따라 성 씨와 함께 ‘화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리허설 때 정해준 자리로 뛰어들어가 정해준 자세를 취했다. 머리 속이 하얘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아역 연기자들과 성 씨의 연기에 따라 주어진 대사를 기계적으로 내뱉을 뿐이었다. ‘저쪽’을 가리키는 곤봉의 끝이 자꾸만 흔들렸다.

등장인물들의 전체 모습을 담은 후 다시 한 번 개별적으로 대사를 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연속성이 중요해요. 그 전 장면에서 취한 자세와 표정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이어서 해야 돼요.”

성 씨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지만 전 장면에서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감독님은 묵묵히 화면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촬영이 끝난 후 현장에 있던 한 스태프가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게 되면 모든 ‘샷’에서 똑같이 행동을 해야 하는데, 성인 연기자들과 달리 아역 연기자들은 그런 것들을 잘 기억을 못한다. 그래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겨줘야 한다”고 귀띔을 해줬다.

이 PD와 함께 연출을 맡고 있는 안소진 PD는 “아이들은 주변 환경에 따라 연기의 폭이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 프로그램은 아역 연기자들이 주인공이 되다 보니 현장에서도 성인 드라마보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기자였어요? 어쩐지 연기하는 게 왜 저런가 했지.”

이 프로그램에서 ‘동진’의 아버지 역할로 출연한 배우 배도환 씨(47)가 말을 건넸다.

○ 계속된 실수

1시간에 걸친 촬영이 끝나고 다음 장면을 위해 평촌 중앙공원으로 이동했다. 운동을 하기 위해 편한 차림으로 공원을 찾은 사람들 속에서 다시 촬영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컷, 엔지(NG·No Good)”

“경찰 2, 웃지 마세요.”

감독님이 기자를 콕 집어 지적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표정 연기를 하는 아이들 뒤에 서 있기만 되는 줄 알았더니, 카메라에 내 표정까지 잡히나 보다.

“네, 알겠습니다.”

“경찰 1과 함께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야 돼요. 어떤 상황인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또 한 번 NG가 이어졌다.

“너무 빨리 들어왔어요. 경찰 1 들어오고 나서 조금 있다 들어와요.”

결국 조연출이 옆에서 손으로 들어갈 타이밍을 알려 주기로 했다.

서너 차례 공중 화장실 문 앞에서 촬영이 계속됐다. NG가 반복될수록 점점 더 위축됐다. 늦은 시간까지 촬영장에 나와 있는 스태프들이 아역 연기자들과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오케이.”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이 드디어 떨어졌다. 기자를 비롯한 스태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어디선가 ‘잠깐만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감독님이 앉아 있는 의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시 한 번 촬영된 장면을 확인했다. 처음으로 기자가 출연한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 써 얼굴도 보이지 않는 기자의 어색한 몸짓에 스스로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감독님이 많이 봐주셨구나…’

결국 재촬영이 결정됐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모자를 다시 한 번 고쳐 썼다. 성 씨가 기자에게 동작 하나 하나까지 친절히 설명해줬다. 기자가 생각도 못해 본 부분들이었다. 단 한 줄의 대사와 지문 뒤에도 출연자들이 곱씹어보고 생각해봐야 할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결국 날짜가 바뀌고, 오전 1시 10분이 되어서야 촬영이 끝났다. 곤봉과 무전기를 소품 담당 스태프에게 반납하고, 불이 환하게 켜진 버스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별 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스태프는 촬영 장비를 챙기고 다시 회사로 돌아갈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힘들지 않아요?”

극 중에서 ‘지승’으로 출연한 함성민 군(13)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잠을 잘 못 자긴 했지만 재미있잖아요.”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막상 촬영이 끝나고 나면 시원해요.”

성 씨가 함 군의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기자의 피로까지 날려 버릴 만큼 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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