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핫 피플]최고지도자 아내를 둔 남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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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외조 필립공 vs ‘실세’ 메가와티 남편 vs 유령같은 메르켈 남편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스 왕족이란 ‘명문가(名文家)’ 타이틀, 세련된 매너와 유머러스한 말솜씨. 세상 어떤 여자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모두 갖춘 이 남자. 하지만 한창 잘나가던 스물한 살 ‘꽃띠 나이’에 그는 한 여인의 남편이 돼 ‘안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남편으로서의 내조, 즉 ‘외조’를 하기로 한 것이다.

1947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85)과 결혼한 필립 공(90)의 얘기다.

결혼 당시 그는 아내를 위해 신분과 신념을 버렸다. 그리스 왕족이라는 이유로 영국 왕실이 결혼에 반대하자 그리스 왕족 지위를 버렸으며 종교도 그리스정교회에서 영국성공회로 바꿨다. 그는 그래도 “인생 최고의 행운은 엘리자베스를 만난 것”이라며 60년 넘는 인생을 기꺼이 아내를 위한 외조에 바쳤다.

10일 영국 역대 군주의 배우자 가운데 최장수 기록인 90번째 생일을 맞는 그의 삶이 생일을 계기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필립 공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왕실 대소사를 직접 챙긴다. 필요할 땐 여왕에게 조언도 거침없이 건넨다. 한 현지 언론은 이런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튀지 않지만 성실하다. 나서진 않지만 적극적이다. 그게 바로 최고의 2인자, 필립 공이다.”

○ “그녀 곁에 언제나”…‘매니저형’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는 여성 지도자가 3명이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여성 최고지도자가 새로 등장한 국가도 지난해만 7개. 이제 여성 지도자는 낯설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들이 ‘퍼스트 젠틀맨(first gentleman)’, 바로 여성 지도자의 남편이다. 이들은 ‘퍼스트레이디’와 때로는 비슷하게, 때로는 다르게 부인을 보좌한다. 개성에 따라 외조를 하는 스타일도 다르다.

‘철의 여인’으로 불린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86)의 남편인 데니스 대처(2003년 사망)는 필립 공과 더불어 ‘튀진 않지만 성실하게’ 외조한 대표적인 퍼스트 젠틀맨으로 꼽힌다.

결혼 전 그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부인이 총리가 된 뒤 조용히 사업을 정리했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부인에게 짐이 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는 대중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언제나 부인 곁에 있었다. 당시 한 현지 언론은 “남편의 꼼꼼한 배려와 넉넉한 재력이 철의 여인을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대처 전 총리는 관직에서 물러날 당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있었던 곳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리였다. 하지만 난 정말 운이 좋았다. 언제나 내 곁엔 최고의 친구이자 후원자, 그리고 비서였던 데니스가 있었다.”

‘호주의 대처’란 별명을 가진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50)의 곁에도 ‘외조의 왕’이 있다. 주인공은 팀 매티슨 씨(54). 미용사 출신 매티슨 씨는 2006년 자신이 일하던 미용실에서 길라드 총리를 손님으로 처음 만났다. 특이한 건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지만 결혼반지가 없다는 사실. 이들 관계는 ‘파트너’ 관계로 알려져 있다. 호주법상 ‘파트너’는 혼인하진 않았지만 부부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갖는 관계다.

‘파트너’ 매티슨 씨의 외조는 ‘남편’을 뛰어넘는다. 길라드 총리의 중요 일정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비서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올해 4월 6·25전쟁 참전 60주년을 맞아 길라드 총리가 방한했을 때도 그림자처럼 함께 다녀 눈길을 끌었다.

길라드 총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혼식 계획은 아직 없다. 하지만 매티슨은 정말 최고다. 난 그가 옆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다. 또 그가 해주는 양고기 요리도 정말 좋아한다.”

○ “내가 누구 남편인지 알아?”…‘플레이어형’

뒤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수준을 넘어 정치 전면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유형도 있다. 주로 정치인 출신 남편들이 그렇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58)의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스는 부인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줬다.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지난해 10월 심장질환으로 숨지기 직전까지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다. 부인의 정적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고 외교·경제 분야 등에서 고문 역할까지 성실히 수행했다. 그의 존재 덕분에 ‘온실 속의 화초’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큰 어려움 없이 정권 초반 연착륙에 성공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64)의 남편 타우픽 키마스 씨(69) 역시 부인 집권 시절 ‘정권의 실세’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부담이 됐다. 집권 민주투쟁당(PDIP) 소속 의원인 그에게 권력자들과 기업가들이 몰렸고, 부패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당시 메가와티 대통령이 가족 모임까지 소집하며 “어떠한 불법적인 혜택도 받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으나 키마스 씨의 뇌물 수수 비리 등 각종 스캔들은 집권 말기까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글로리아 아로요 전 필리핀 대통령(64)도 집권 시절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변호사 출신 남편 호세 미겔 아로요 씨(65)가 각종 이권에 개입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미겔 씨는 불법 복권게임 운영자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다 2005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 “나서지 않는 게 돕는 거”…‘은둔형’

지도자의 남편이 누구인지 잘 모를 정도로 조용히 지내는 유형도 있다.

세계 최고(最高) 영향력을 지닌 여성 지도자로 꼽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57)의 남편 요아힘 자우어 씨(62)가 대표적이다. 저명한 양자화학자인 자우어 씨는 독일 국민 사이에서 ‘오페라의 유령’으로 불린다. 오페라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더 큰 이유다.

그는 메르켈 총리가 선거운동할 당시에도 거의 나서지 않았다. 당선 이후에도 총리 취임식조차 TV로 지켜봤을 정도로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다.

헬렌 클라크 전 뉴질랜드 총리(61)의 남편 피터 데이비스 씨(64) 역시 부인의 집권 시절 정치와 거리를 뒀다. 사회학 교수였던 그는 부인이 총리가 된 뒤에도 전과 다름없이 40분 동안 걸어서 출근하고, 퇴근 때는 시내버스를 이용해 화제가 됐다.

부인이 밖에서 활동할 땐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집에서 보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총리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차를 한 잔 끓여 침대에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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