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섭 교수의 패션 에세이]<14>디자이너여, 시그너처가 있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퀼팅 디테일이 돋보이는 샤넬의 블랙 레더백(위)과 멀티스트라이프 패턴을 가방 속에 프린트된 자동차에 적용한 폴스미스의 ‘미니 온 로케이션’백. 샤넬, 폴스미스 제공
퀼팅 디테일이 돋보이는 샤넬의 블랙 레더백(위)과 멀티스트라이프 패턴을 가방 속에 프린트된 자동차에 적용한 폴스미스의 ‘미니 온 로케이션’백. 샤넬, 폴스미스 제공
195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가 요즘 익숙하게 듣고 있는 패션디자이너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아틀리에를 오픈하거나 사업을 확장했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디오르, 샤넬, 발렌시아가, 발망, 지방시 등이 그들이다. 적어도 이들의 이름을 딴 향수 또는 립스틱 하나 정도는 접해봤음직한 글로벌한 브랜드들이고 디자이너 사후에도 브랜드 리노베이션을 통해 최근까지 패션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모두 디자이너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쓰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이름값’을 하는 패션 제품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깊숙이 감추어진 또다른 내공의 ‘이름값’이 있다. 바로 그들이 만든 어떤 제품을 단 0.1초 만에, 한눈에 그 디자이너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시그너처’다. 옷 안의 라벨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아니 그 라벨을 간략히 표기한 브랜드 로고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디자이너만의 개성이자 독특한 감성이 ‘시그너처’이다.

예를 들어 샤넬은 검정 바탕에 흰색 고딕체로 쓴 샤넬이란 브랜드 라벨에서 샤넬(CHANEL)의 앞 글자 ‘C’만을 겹쳐 더블 C 모양의 로고를 만들었다. 이 심벌은 단추 구두 핸드백 등 여러 곳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굳이 로고를 보지 않고 샤넬의 대표적인 가죽 핸드백의 퀼팅 디테일만 봐도 누구든 샤넬임을 인지할 수 있다. 만약 다른 브랜드에서 이 디테일을 차용한다면 샤넬의 아류작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 퀼팅 디테일은 사실 현대 패션의 실용적 멋을 중시하는 코코 샤넬 여사가 가죽의 스크래치를 방지하기 위한 배려에서 만든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투박하고 기초적인 재봉질이 고급 핸드백에 쓰이게 된 것.

디자이너 폴스미스 또한 멋스럽게 휘어진 폴 스미스란 로고나 브랜드 라벨을 보지 않고도 다양한 색상이 조합된 멀티 스트라이프 패턴을 보면 브랜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티타임을 가지면서 우연히 이 멀티스트라이프 패턴의 탄생 배경에 대해 듣게 됐다.

여행을 좋아하고, 수집을 좋아하고,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그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오래된 천조각들을 모았는데, 그 실오라기를 한 가닥 두 가닥씩 뽑아 심심풀이 삼아 나무막대에 이리저리 감아보다 발견한 것이 바로 이 멀티스트라이프 패턴이라는 것이다.

평생 이런 시그너처 스타일을 찾아 헤매다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이들처럼 이 스타일을 대중과 공유하며 길이 남기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순수 예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 실크스크린,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마르셀 뒤샹의 오브제 아트…. 모두 흉내 낼 수 없는 창작물, 그들만의 시그너처다. 최근 삼성전자가 국내 대학원생에게서 받은 디자인을 해외 유명 디자이너의 것처럼 홍보한 것은 성명표시권 침해라는 판결이 나와 화제가 된 바 있다. 필자가 그 대학원생의 지도교수로서 몇 해 동안의 마음고생을 다 보았던 지라 감회가 남다른 사건이었다.

디자이너에게 있어 시그너처란 단순히 멋들어진 사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디자이너의 분신이자 생명이자, 그의 정신이 깃든 혼이다.

패션디자이너·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