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21>바리톤 김동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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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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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외양만 멋있게 찍는다고 꽃이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비록 인공적으로 화반에 꽂힌 꽃일지라도 그 색채와 구도가 조화를 이루면 꽃을 꾸민 사람의 마음이 사진에 잘 나타나게 된다. 김동규씨가 찍은 집안 테이블 위의 꽃들.
꽃의 외양만 멋있게 찍는다고 꽃이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비록 인공적으로 화반에 꽂힌 꽃일지라도 그 색채와 구도가 조화를 이루면 꽃을 꾸민 사람의 마음이 사진에 잘 나타나게 된다. 김동규씨가 찍은 집안 테이블 위의 꽃들.
바리톤 김동규 씨
바리톤 김동규 씨
《성악가이자 교육자인 어머니는 자식의 음악적 재능을 눈치 채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았다. 노래를 불러보라거나 잘한다는 칭찬조차 삼갔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어느 날. 어머니의 노래 ‘보리밭’을 듣고 있던 아들은 자연스레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내는 생목소리의 고음이었지만 음정 박자가 정확했다. 삼형제 중 유일하게 스스로 노래를 부른 막내는 어머니의 배려 속에 자연스럽게 성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대학에서는 성악을 전공했고 이탈리아 유학길에도 올랐다. 1991년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서 다듬어진 우람한 목소리는 마침내 빛을 발했다. 베르디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고 그해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의 주역가수가 됐다. 성악가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을 한 번에 이룬 것. 그 뒤 오페라 ‘토스카’를 시작으로 오랫동안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오가며 오페라가수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2002년 완전히 국내로 돌아온 그는 본업인 클래식 공연은 물론이고 국악 대중가요 등 다른 음악과의 크로스오버 공연, TV 오락성 프로 출연,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진행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국내 성악가로는 드물게 대중적 인기도 얻었다. 콧수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으며 그를 얘기할 때면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철학적 수사가 따라붙었다.

성악가 바리톤 김동규 씨의 이야기다. 최근 그가 사진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는데 만나 보면 사진에 대해 서로 나눌 말들이 있을 것 같다고 한 지인이 알려왔다. 그를 서울 반포 사무실에서 만나 음악과 사진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콧수염이 인상적입니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 영국 매니저의 조언으로 콧수염을 길렀습니다. 농구나 배구에도 포지션이 있듯이 성악에도 포지션이 있습니다. 제 목소리 바리톤은 굵고 힘이 좋아서 조역을 하기엔 어울리지 않아요. 주역의 자리 중에서도 주로 왕이나 장군 같은 역할이 맞는 목소리예요. 그런데 제 얼굴이 동안이라 앳되게 보이니까 매니저가 나이가 들어 보이게끔 콧수염을 기르자고 한 거지요. 지금도 배역을 소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본인의 행동 특징을 얘기할 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자유로운 영혼’이란 제가 자유방임으로 삶을 산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음악적 규칙에 얽매이기보다 나름대로 자유롭게 부른다는 뜻입니다.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도 작곡 오류가 있을 수 있고 현재 음악가들도 요즘에 맞게 당시 음악을 해석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작곡가가 떡 하니 밥상을 차려 놓으면 그대로 먹을 수도 있지만 반찬의 종류를 보고 나름대로 섞어서 비빔밥을 만들어 보기도 하는 거죠. 가곡 ‘보리밭’이 4분의 4박자라고 꼭 그렇게 부르기보다는 악상 기호가 없더라도 장식음을 넣거나 일부러 더 느리게 불러봅니다. 처음에는 ‘뭐야, 정통이 아니잖아’ 하는 논란도 있었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그렇게 하다 보니 이제는 ‘저 친구 특이하네’라고 인정해 주시더라고요.”

음악의 길을 가는 데 영향을 주신 분이 있다는데….


“어머니죠. 아까 ‘자유로운 영혼’ 얘기가 나왔지만 사실 그 속에는 반항아라는 뜻도 담겨 있잖아요. 만일 어머니가 저를 구속해 피아노학원 보내고 노래 부르게 했으면 제가 계속 노래를 했을까요. 저는 여자와 사귀면서도 친해졌다고 저를 막 구속하면 못 견디는 성격이에요. 교육자인 어머니는 그걸 아셨고 낚시에 미끼를 단 다음 제가 물 때까지 기다리신 거죠. 2009년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어요. 더 시간이 지나면 같이 무대에 설 기회가 없을 것 같았어요.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음악회 ‘아름다운 당신에게’ 공연에 같이 서자고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하셨어요. 수술한 지 오래지 않았지만 통증이 사라진 때문인지 무대에서 너무나도 멋지게 노래를 부르셨어요. 당시 쏟아지는 박수는 훌륭한 음악가를 키운 어머니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니라 노래를 잘한 성악가 박성련(75)에게 보내는 박수였어요. 박수 색깔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슬럼프는 없었나요.

“가정은 항상 긴장하며 가꾸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죠. 1999년 이혼 후 슬럼프가 찾아왔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 혼자 오피스텔에 살면서 커튼을 쳐놓고 피아노 한 대, 침대 하나 놓고 6개월을 지냈어요. 영화 ‘올드보이’에서처럼 독방에서 자장면만 시켜 먹었어요. 방 안에 처박혀 생각해 보니 제가 살아오면서 이뤘던 모든 게 허망하기 짝이 없었어요. 모든 게 원점이란 느낌이었어요. ‘내가 노래를 삶의 도구로만 쓴 게 아닐까’ ‘진정 내가 오페라를 좋아했나’ 등 갖가지 의문에 짓눌려 일어설 용기조차 나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DJ로 유명한 당시 MBC 김기덕 국장이 저를 찾아와 사람들이 좋아하는 크로스오버 뮤직을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집중해 보자’는 생각을 갖게 됐죠. 몇 달 동안의 노력 끝에 ‘디투어(Detour)’라는 크로스오버 앨범을 선보이면서 슬럼프에서도 자연스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디투어(우회하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이때가 제 인생에서 또 다른 전환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디투어 앨범 속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반응이 좋아 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어요.”

카메라는 언제부터 접했나요.

“대학교 때 친구가 카메라를 산다고 해서 상점에 따라간 적이 있었어요. 전문가용 ‘젠자 브로니카’라는 일안 반사식 중형 카메라를 비싼 값에 떡 하니 사더라고요. 그 친구와 여행 삼아 속리산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어요. 그 친구 카메라로 처음 사진을 찍어 봤어요. 멋지게 생긴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니 뭔가 작품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럼 현재 중형 카메라를 쓰시나요.

“그렇진 않아요. 지금은 디지털시대잖아요. 음악은 선율이냐 음질이냐가 중요해요. 요즘 앨범 CD를 만드는 가수나 제작자들이 음질을 어디에 맞추는지 아세요? 자동차나 컴퓨터 오디오에 맞춰요. 비싼 오디오 기기에 맞추지 않아요. 음반 자체가 디지털음이기 때문에 1억 원짜리 오디오에 얹으나 자동차 오디오에 얹으나 소리의 품질 면에선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카메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진을 찍으면 주로 내용에 감동을 받지 어떤 카메라로 찍었느냐는 사진전문가들에게만 중요한 것 같아요. 아마추어인 제 처지에선 지금 쓰는 하이브리드 카메라 ‘올림푸스 펜’ 정도면 만족합니다. 작지만 이걸로도 제가 찍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찍을 수 있으니까요. 단, 작은 디지털카메라지만 사진만큼은 아날로그적인 인간 냄새가 나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주로 찍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저는 특정한 장르를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안데스나 티베트 같은 외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찍어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어요. 특정 대상에 국한하기보다 어디를 가다가 그때가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진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그리스를 여행할 때 본 풍경인데 네 명의 노인이 똑같은 전통복장을 하고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어요. 하지만 옷 색깔은 모두 달랐죠. 이 모습을 찍으면 저절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쉽게도 당시에 저한테 카메라가 없었어요. 그런 일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여행할 때는 꼭 카메라를 챙기고 주위를 유심히 봅니다. 사진은 기록이라는 면에선 중요한 일기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났던 행적들을 한순간에 되살려 주잖아요.”

언제쯤 자신의 사진들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을까요.

“일도 하면서 취미로 즐기는 사진이기에 시간이 걸리겠죠. 제 주관대로 세상을 찍다 보면 언젠가는 일기처럼 되어 있겠죠. 그때 보여 드릴게요. 언제라고 정하면 저는 안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사진과 성악이 유사한 점이 있다면….

“유사한 것은 둘 다 예술이라는 점이겠지만 감동의 포인트는 달라요. 오히려 서로 다른 점을 잘 활용하는 게 어떨까요. 음악은 순간이 지나면 감동이 가슴에 남지만 형체가 없잖아요. 그 감동을 나중에 다시 느끼려면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도움이 되는 식으로요.”

성악가로서 소리를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찍어야 할까요.

“사진을 찍어 보면 사진에서 괜히 슬퍼지거나 기뻐지는 느낌을 받잖아요. 또 스냅으로 찍은 피사체의 모습에서 역동감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따라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 입을 벌리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 모습, 거대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웅장한 폭포를 보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저만 그런가요?”

사실 그는 사진을 한 시기로 보면 이제 입문 단계다. 하지만 사진에 관해 어떤 질문을 던져도 오래 사진을 한 사람처럼 막힘이 없다. 그가 찍은 사진도 의외로 아이디어가 좋고 재미있었다. 나름 사진에 대한 공부를 했거나 생각이 많다는 증거이리라. “지금은 뭐랄 수 없지만 앞으로 제가 좋아하는 인물사진들을 찍으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넣어보겠습니다”라며 오히려 사진에 대한 당찬 포부를 밝힌다. 거침없는 당당함이 그의 매력인가 보다.

언젠가 보니 1인 시위도 하셨습니다.

“제가 서울시 홍보대사를 할 때인데 개인적으로 저도 무상급식에 반대했어요. 시기적으로 볼 때 너무 급하게 그쪽으로 가는 느낌이었거든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화가 난 건 투표를 거부하자는 움직임이었어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무상급식에 반대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시민들에게 투표하자고 독려차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 거죠.”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 맞다. 음악도 생활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 올 연말엔 유열 최성수와 함께 연말 조인트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다. ‘너무 대중음악 쪽으로 넘나들면 클래식음악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모차르트나 베토벤도 당대엔 대중음악가였다. 그런 음악이 쌓여서 클래식이 되었을 뿐이다. 팝송을 불러도 성악가 김동규의 목소리로 자신의 색깔대로 노래하기에 문제가 없다’는 대답이다.

그는 매년 180회 정도의 클래식 공연을 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장르의 누구와도 인연의 계기가 있다면 스스럼없이 만난다.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서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지금처럼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진행뿐 아니라 춤도 추고 퀴즈도 푸는 프로그램에 여전히 출연할 것이다. 요즘 그는 늦가을까지 농사를 지은 탓에 거친 농부의 손이 되었다. 가끔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기도 한다. 자신의 음악을 중심에 두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그는 좀 더 자유스러워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ku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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