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열아홉 청년 혜초가 서역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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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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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서 만난 印스님에 감화… 기행권유받고 4년 대장정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둔황 장경동 굴 입구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중국 둔황 막고굴 17호굴 장경동 입구. 이번 전시엔 왕오천축국전 원본과 함께 장경동 모형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둔황 장경동 굴 입구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중국 둔황 막고굴 17호굴 장경동 입구. 이번 전시엔 왕오천축국전 원본과 함께 장경동 모형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불국토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8세기 승려들 사이에선 구법(求法) 여행의 열풍이 불었다. 국제 감각을 익히기 위해 당으로 유학 가는 학자도 많았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보며 불국을 꿈꾸었던 열다섯 소년 혜초는 719년 드디어 구법 기행을 감행한다. 그가 우선 선택한 곳은 중국이었다. 그는 해로를 이용해 광저우(廣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혜초는 천축(인도의 옛 이름) 출신의 밀교승 금강지를 만났다. 금강지는 제자 불공과 함께 스리랑카와 수마트라를 거쳐 광저우에 들어왔다. 혜초는 금강지를 통해 밀교를 만났다. 금강지는 혜초에게 천축의 불교 이야기를 들려주며 천축에 가볼 것을 권했다. 723년 혜초는 금강지가 건너온 바닷길을 그대로 되짚어 인도로 갔다.

혜초는 4년 동안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기행을 마치고 727년 장안(지금의 시안)에 도착해 2만 km의 대장정 ‘왕오천축국전’을 마무리했다. 그곳에서 그는 또다시 금강지와 불공을 만났다. 운명 같은 두 번째 만남. 혜초는 장안에서 금강지를 모시고 밀교와 함께 인생을 마치기로 마음먹었다. 고국 신라 땅이 그리웠으나 그는 이미 세계인이었기에 국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후 약 1200년이 흐른 1900년 실크로드의 요충지 둔황의 막고굴. 16호굴을 수리하던 왕원록(王圓(녹,록))이라는 사람이 우연히 모래벽 뒤에 있는 새로운 굴(17호굴 장경동)을 발견했다. 진흙으로 바른 문을 뚫고 들어가 보니 3m 높이로 고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8년 뒤,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이 장경동 고문서 더미 안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했다.

왕오천축국전이 어떻게 둔황 막고굴에 있는 것일까. 인도, 서역 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혜초가 둔황에 들러 초고본을 남겨놓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배경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실크로드와 둔황’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는 왕오천축국전 원본(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과 장경동의 실물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약 1300년 만에 저자의 고국으로 돌아온 왕오천축국전. 둔황에 가서도 볼 수 없는 17호 장경동. 왕오천축국전 발견 당시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동영상=Interview 도전하는 사람들, 탐험가 남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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