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5>미디어그룹의 리더로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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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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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언론 첫 中총리 단독회견… 韓-中교류 디딤돌 놓다

1995년 2월 25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중국 리펑 총리 단독회견 기사(왼쪽 사진). 한국 언론사로는 최초의 중국 총리 인터뷰였다. 리 총리와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이 한반도 문제를 비롯해 한중관계, 중국의 정치적 현황 및 국제적 관심사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오른쪽 사진은 리 총리(오른쪽)가 김 회장에게서 전달받은 ‘공자사상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논문집을 살펴보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95년 2월 25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중국 리펑 총리 단독회견 기사(왼쪽 사진). 한국 언론사로는 최초의 중국 총리 인터뷰였다. 리 총리와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이 한반도 문제를 비롯해 한중관계, 중국의 정치적 현황 및 국제적 관심사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오른쪽 사진은 리 총리(오른쪽)가 김 회장에게서 전달받은 ‘공자사상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논문집을 살펴보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일보의 거룩한 창간 전통에 다시 한 번 중흥의 불을 댕기는 제2의 창간을 이룩해야겠다는 결의를 밝힙니다.”

1989년 3월 25일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한 화정 김병관(1934∼2008)은 4월 1일 취임사에서 동아일보의 제2창간을 주창했다. 이전까지는 권력의 횡포를 억지하는 저항적 기질만 가지고도 대다수 국민의 호응과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었지만 달라진 시대에는 시시비비에 대한 균형감각과 민주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투철한 정신이 더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창간 정신인 민족 민주 문화주의도 새롭게 조명했다. 민족주의는 일제강점기 지상과제였던 독립을 넘어 민족의 화합과 통일 및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기틀로, 민주주의는 반제국주의 반독재의 소극적 저항을 뛰어넘어 자유 평등 정의를 추구하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개념으로, 문화주의는 계몽성에서 벗어나 창조성의 자양분이 되고 새로운 삶의 질을 꽃피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의 기초가 마련된 1980년대를 지나 민주화 세계화 정보화의 시대로 들어선 1990년대에 맞춘 새로운 이정표였다. 이는 동아일보를 21세기 종합 미디어그룹으로 도약시키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 공정사회를 위한 부단한 노력

1980년대를 거치며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 갖춰졌지만 1990년대 들어서도 동아일보는 공정하고 깨끗한 민주사회를 위한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1990년 10월 5일 군 정보기관인 국군보안사령부가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사실이 윤석양 이병의 기자회견으로 불거지자 동아일보는 연일 1면과 사회면 머리기사로 다루며 사안의 심각성을 부각했다. 당시 기자협회보는 “보안사 사찰 보도와 관련해 동아일보가 지면 구성, 보도 태도, 접근 방식 등에 있어 타지에 비해 돋보였다. 동아는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어 정치사찰 금지와 군의 정치적 중립의 계기로 삼으려는 적극적 자세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1990년 2월 노태우 정부의 최대 비리인 수서특혜분양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동아일보는 사건을 눙쳐 버리려는 정권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기사는 물론이고 각계 유명 인사들이 쓰는 ‘긴급제언-이 나라 이대로 안 된다’ 제하의 특별기획 시리즈를 8일 동안 연재했다.

1995년 10월 19일자 50판 신문에는 한국사회를 뒤흔든 ‘노태우 비자금’ 사건의 서막을 여는 특종기사를 실었다. 이후 이 사건은 연일 지면을 가득 채웠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으로서 구속 수감됐다.

1999년 11월 18일자에는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 씨가 남편 구명을 위해 김태정 검찰총장의 부인 연정희 씨에게 고가의 옷을 건넨 이른바 ‘옷로비 사건’과 관련한 단독보도를 내보냈다. 1면 머리기사로 김정길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의 부인 이은혜 씨가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부인 배정숙 씨에게 이른바 ‘옷로비 사건’과 관련해 국회 위증을 요구했다는 내용이었다. 본보 법조팀이 6개월간 끈질긴 추적취재를 통해 얻은 결실이었다. 현직 검찰총장의 부인인 연 씨가 연루된 사건을 검찰이 6일 만에 ‘실패한 로비’로 결론 내린 것에 의구심을 품고 추적한 성과였다.

○ 세계화·정보화에 대응

1990년대는 국제화 혹은 세계화가 사회적 주요 의제였다. 이에 발맞춰 본보는 세계 유수 언론사와 협약을 체결하거나 강화하며 세계화 시대 미디어그룹으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1995년 2월 25일자에는 중국 리펑(李鵬) 총리와의 단독 회견을 게재했다. 한국 언론사상 중국 최고위층과의 첫 단독 회견이었다. 이에 앞서 본보는 1992년 9월 12일 중국 런민(人民)일보와 양국 간 친선 우호 이해의 증진을 위한 각종 학술 문화 스포츠 교류사업을 펴 나가기로 합의했다. 한중 수교가 맺어진 지 19일 만에 이뤄진 일로, 양국의 대표 언론기관이 제휴함으로써 양국 민간교류의 발판이 됐다.

1996년 9월에는 1987년부터 교류해온 일본 아사히신문과 ‘2002 공동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2002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에 따른 지면 공동 제작 및 문화 스포츠 인적 교류 등 각종 공동 사업을 펼치기로 한 것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협력사업 추진을 위해 양국의 민간이 구성한 첫 공동위원회였다.

1992년 6월에는 옛 소련의 붕괴 여파로 격변하고 있는 러시아 대륙의 뉴스를 신속 정확히 보도하기 위해 러시아연방의 대표적인 신문 이즈베스티야와 기사 협력 및 인사 교류 협약을 체결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영국의 더 타임스, 일본의 아사히신문에 이어 러시아의 이즈베스티야, 중국의 런민일보와도 협력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유력지의 뉴스와 논평을 더 많이 독자에게 전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또 하나의 큰 흐름은 ‘정보화’였다. 이에 발맞춰 동아일보는 1992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옥에서 초고속 오프셋 윤전기 가동식을 가졌고, 1993년 4월 1일에는 창간기념호를 조간으로 발행해 30년간의 석간 시대를 뒤로하고 조간시대를 열었다.

1999년 12월 30일에는 21세기 뉴미디어 시대의 심장이 될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를 완공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뉴미디어시대 선도하는 ‘대한민국 뉴스의 심장’
2000년 1월 1일 준공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

2000년 1월 1일 준공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는 서울 도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0년 1월 1일 준공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는 서울 도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새 천년에도 민족의 신문, 독자의 신문으로 헌신할 수 있는 동아일보의 터전이 완성됐다.”

2000년 1월 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139. 동아일보 신사옥인 ‘동아미디어센터’ 준공식 기념사에서 김병관 회장은 “멀티미디어시대와 인터넷시대를 선도하는 첨단 신정보 시스템과 ‘불편부당 시시비비(不偏不黨 是是非非)’의 정신을 조화롭게 구현하겠다”고 말했다. 1992년 서대문구 충정로 사옥으로 옮겨간 지 8년 만에 다시 동아일보 광화문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동아미디어센터는 지하 5층, 지상 21층, 총면적 2만3200m²의 인텔리전트 오피스빌딩으로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하고 대우건설이 시공을 맡았다. 철골구조에 외벽 대부분을 유리로 감싸 건물 외형 이미지에서 정직하고 투명한 언론의 사명을 강조했다. 1층 로비에는 작가 육근병 씨가 제작한 비디오 조각작품 ‘열매 눈’을 설치했다. 천장의 원형 지지대에 4개의 줄기를 매달고 145개의 비디오 모니터를 수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어나는 듯한 형상으로 묶어 놓아 ‘살아있는 시대정신과 새 시대에 대한 염원’을 표현했다. 우거진 넝쿨 모양을 한 비디오 줄기는 현대문명과 대자연이 조화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동아미디어센터는 2000년 4월 제18회 서울시건축상 준공건축물 부문 동상과 야간경관조명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10월에는 건설교통부와 대한건축사협회가 선정하는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을 수상했다. 세종문화회관 덕수궁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 밀집한 장소적 특성을 녹여내면서 한국 언론을 선도해 온 동아일보의 이미지를 잘 부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 12월 15일에는 건물 4, 5층에 한국 신문의 100년 발자취와 미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국내 첫 ‘신문박물관’을 열었다. 인쇄시설 등 600여 점의 전시품을 갖춘 신문박물관은 신문역사관, 미디어영상관, 기획전시관으로 구성됐다. 특히 역사관은 구한말 한성순보 독립신문 등의 탄생, 일제강점기 민족 신문의 탄생과 저항, 광복 후 신문 매체의 변천 과정 등을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소개했다. 미디어영상관에는 신문제작 체험 코너를 마련해 관람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 동아닷컴 출범 14년, 인터넷방송-웹진-취재후기… ‘콘텐츠 저수지’로 자리매김 ▼

2010년 10월 동아닷컴(www.donga.com)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한가운데 자리한 인터넷 방송뉴스 동아뉴스스테이션 코너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홈페이지 상단에는 누리꾼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벌이는 동아누리, 기자블로그와 함께 운영되는 저널로그 등의 코너도 자리 잡았다.

개인용 컴퓨터(PC)와 인터넷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1990년 8월 동아일보는 컴퓨터를 통해 신문기사를 읽는 ‘전자신문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뉴스 채널의 첫걸음을 뗐다. 1996년 6월에는 공학박사 출신으로 국내 정보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오명 사장을 영입해 정보화 사회 진입을 본격화했다. 오 사장은 취임사에서 “동아일보는 정보혁명의 시대에 정보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그해 인터넷 무료 강좌를 진행하는 동시에 대학을 정보화 중심축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인터넷 유스캠프’ 운동을 벌였다.

1996년 10월에는 동아닷컴의 전신인 마이다스동아일보가 출범했다. 마이다스동아일보는 서비스 시작 1년 만에 방문자 수 500만 명을 넘기며 당시 국내 전자신문 중 최단 기간 최다 인터넷 이용자 수를 기록했다.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 때는 하루 평균 클릭 수가 1500만 건이 넘었고 1999년 제1연평해전과 탈옥수 신창원이 체포된 날은 접속 폭주로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새 천년을 맞은 2000년 1월 마이다스동아일보는 동아닷컴으로 이름을 바꾸고 내용에도 변화를 줬다. 해당 신문의 브랜드 인지도를 강화하는 역할에 그쳤던 인터넷 신문 서비스에서 벗어나 인터넷 신문 사상 처음으로 자체 취재진을 구성해 닷컴 전용 기사를 쓰며 콘텐츠를 확보했다. 이용자들은 동아닷컴에서 신문에서 볼 수 없었던 뉴스를 보기도 하고, 자신들의 블로그를 만들어 활용할 수도 있다.

가십 위주의 연예 기사로 넘쳐나는 인터넷 정보와 차별화하기 위해 2009년 10월 30일에는 동아일보 기자와 외부 필진이 참여한 대중문화 전문 웹진 ‘O₂’를 창간했다.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되는 O₂에는 연예계 소식, 패션, 책, 영화 등 문화 다방면의 소식과 분석들이 올라온다. 지면에 실린 기사는 물론이고 기자들의 취재후기, 동아방송, 닷컴 전용 기사, 개성 넘치는 웹진에 이르기까지 동아닷컴은 동아미디어그룹에서 생산하는 모든 콘텐츠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종합 채널로 자리매김했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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