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이야기’ 20선]<10>문명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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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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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과 바다/주경철 지음/산처럼

《“모든 승무원은 현안에 대해 동등한 표결권을 갖는다. 어느 때든 식료품과 주류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공동의 선(善)을 위해 절약하기로 결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18세기에 활동한 영국인 선장 바르톨로뮤 로버츠와 그 휘하 선원들이 작성해 따랐던 11개 항목의 단체행동 규약 중 1번의 내용이다. 세 번째와 여섯 번째 규칙은 다음과 같다. “주사위든 카드놀이든 돈을 가지고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 “소년이나 여자를 배에 데려와서는 안 된다. 여성을 유혹해 배로 데려온 것이 발각된 자는 사형에 처한다.”》
明정화가 바다를 계속 누볐다면


로버츠 선장이 이끄는 배의 선원들은 엄격한 기강의 모범적 해군이었을까. 그는 같은 시절 바다 위에서 생활한 뭇 뱃사람이 한결같이 두려워한, 악명 높은 해적 선장이었다. 현대인에게 익숙한 해적 이미지의 표본은 럼 술병과 칼을 양손에 나눠 든 채 예측불허의 망나니짓을 일삼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속 잭 스패로 선장(조니 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당시 유럽 해적선의 실상이 무법천지 아수라장보다는 기성 사회와 궤를 달리하며 나름의 새 질서를 형성했던 특수 공동체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제1규약에서 보듯 그 기틀은 현대의 민주주의 원리와 일맥상통한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해적선, 노예선, 아편전쟁 등 바다와 관련된 소재들에 대한 일반 상식의 이면(裏面)을 흥미롭게 파헤친다. 파격적 해설의 근거는 전공자로서 꼼꼼히 자료를 찾으며 집어낸 역사 기록들이다. 단편적 상식의 허점을 파고들면서도 무리한 비약은 없다. 오히려 비슷한 주제에 대해 기술한 기존 서적 가운데 과장된 의미 부여나 해석이 있었던 사례를 언급하면서 날카롭게 비판한다.

“개빈 멘지스는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다소 지나치게 과감한 추론을 하고 있다. 명나라의 환관이었던 정화(鄭和) 선단(船團)이 희망봉을 돌아 항해하면서 아프리카의 윤곽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일본 도쿄 류코쿠대에 보관된 강리도(疆理圖) 등의 지도가 이 정보를 이용해서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이런 추론을 감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정화는 사상 최대의 선단을 지휘해 아프리카 동쪽 해안까지 나아가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전체에 위세를 떨쳤다. 여기까지는 중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내용이다. 저자는 정화의 활동을 먼저 상세히 언급한 뒤, 그 무렵 중국이 갑작스럽게 해상 진출을 포기한 사회적 배경을 들여다본다. 해상 팽창을 주도했던 환관 세력이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득세한 신진 관료들에게 밀려나는 와중에 세계 역사의 방향타가 뒤집혔다는 설명이다.

“중국의 해상 후퇴와 곧바로 이어진 유럽의 해상 팽창은 세계사의 큰 흐름을 갈라놓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국가 전체의 무게중심이 바다에서 내륙으로 옮겨진 것은 당시 베이징 천도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맹렬히 피어났다 급작스레 사그라진 불꽃처럼 15세기 초 전력을 다해서 아시아의 바다를 누볐던 중국이 갑자기 스스로 주인공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저자는 1600년대 조선 땅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의 후일담을 소개하며 근대 조선과 일본의 국운이 갈라진 이유를 조명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탈출한 하멜을 심문한 나가사키 지사는 체계적으로 54가지의 질문을 던져 조선의 군사장비, 군함, 종교, 인삼 등에 대한 정보를 빼냈다. 또한 하멜이 어느 나라 사람이며 왜 이곳에 왔는지 등 조선이 14년간 알아내지 못한 것을 단 하루 만에 모조리 파악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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