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일제강점기의 한국과 일본]⑥문학 속의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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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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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민중은 초상집 개”… ‘술 권하는 사회’서 모멸의 삶 그려

현상윤 ‘핍박’
‘죄없는 죄인’ 불안감 표현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
지식인의 무기력함 호소

이기영 ‘민촌’
벼 두 섬에 딸 파는 실상 부각

이효석 ‘도시와 유령’
사람 취급 못받던 빈민 조명

《일제강점기 널리 유행한 구전민요에 이런 대목이 있다.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묘지) 가고/아이깨나 노을(낳을) 년 갈보질 가고/목도깨나 멜 놈은 일본 간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똑똑한 사람은 감옥에 가고, 일 잘하는 사람은 허망하게 죽고, 출산능력이 있는 여자는 사창가로 팔려가고, 노동력이 있는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일본으로 가던 현실을 이 민요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민요가 말해주는 것처럼 일제강점기는 지식인에게도 민중에게도 고통스러운 시대였다. 조선 사람들은 1917년에 현상윤이 소설 ‘핍박(逼迫)’에서 말한 것처럼 타민족에게 지배당하는 현실 때문에 불안하게 살면서 열등감과 모멸감에 시달려야 했다.
홍정선 인하대 교수》
“일찍이 강도나 사기취재(詐欺取財) 같은 범과(犯科)가 없거니 아무 경관에게 포박될 일도 없다. 그러나 그가 나를 본다. 나를 꾸짖는 듯하다. 나를 잡으려는 듯하다. 발을 내놓을 때마다 바싹바싹 다가드는 듯하다.” 현상윤의 이 말처럼 이유 없이 스스로를 죄인시하면서 살아야 했던 시대가 일제강점기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뒤 누구보다 빨리, 심각하게 절망감을 느낀 이들은 지식인들이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늠할 수 없는 꽉 막힌 현실, 지식과 능력을 사용할 곳이 없는 현실 앞에서 절망했다. 말단 공무원이 되어 민족의 자존심을 버리고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 외에는 변변한 일자리 하나 찾기 힘든 식민지 현실이 그들을 절망하게 만들었고, 가족을 돌보기는커녕 호구지책도 마련하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처지가 그들을 자학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1920년대 초에 염상섭은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이런 지식인들의 모습을 가리켜 사지를 핀셋에 고정당한 채 파들파들 떨며 죽어가는 개구리에 방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시대, 정상인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시대로 파악했다. 또 현진건은 ‘술 권하는 사회’에서 지식인 주인공으로 하여금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라고 자학적으로 토로하게 만들었다.

일제에 땅을 뺏기고 간도의 황무지로 쫓겨 가는 조선 농민들. 최서해는 ‘탈출기’에서 가족을 데리고 간도로 간 주인공이 가난으로 인해 좌절하는 모습을 그린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제에 땅을 뺏기고 간도의 황무지로 쫓겨 가는 조선 농민들. 최서해는 ‘탈출기’에서 가족을 데리고 간도로 간 주인공이 가난으로 인해 좌절하는 모습을 그린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식민지 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의 교육이 생산한 지식인들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독설을 퍼부은 사람은 채만식이었다. 그는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고등보통학교, 상업학교, 농업학교, 기술학교 등 당시 일반적 교육기관이 키워낸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이리하여 민중의 지급보급에 애쓴 보람은 나타났다. 면서기를 공급하고 순사를 공급하고 군청 고원을 공급하고 간이농업학교 출신의 농사개량 기수를 공급하였다.’ 채만식의 예리한 지적처럼 일제 치하에서 각종 교육기관이 키워낸 대다수의 인재는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말단 기능인이며 하수인이었다.

반면에 대학이나 전문학교를 졸업한, 인텔리라고 부르는 전문고급인력은 당시 대표적인 실업자 군상이었다. 이상이 ‘가정’이란 시에서 ‘문을 암만 잡아 당겨도 안 열리는 것은 안에 생활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나는 우리집 내 문패 앞에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 대다수는 가장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가장 노릇을 할 수 없었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처한 이 같은 당혹스러운 현실을 가리켜 채만식은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 신세라고 쓰디쓰게 한탄했다. ‘인텔리가 아니 되었으면 차라리 (삭제 당함)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은 소작인과 도시 빈민이었다. 1920년대 초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소작인들과 식민지 근대화의 진전에 따라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한 도시 빈민들은 최서해의 소설 ‘탈출기’가 말해주는 것처럼 버린 과일껍질을 주워 먹을 정도로 참담하고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처참함 때문에 팔봉 김기진은 1924년 ‘경성의 빈민-빈민의 경성’이란 수필에서 ‘경성인구 28만에는 실업자가 20만’이라고 지적하면서 ‘서울은 도깨비의 세상이다. 조선이 도깨비의 세상이다’라고 외쳤다.

윤동주의 ‘서시’ 육필 원고. 동아일보 자료 사진
윤동주의 ‘서시’ 육필 원고.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제 치하 도시 빈민들의 생활상을 생동감 있게 그린 작품에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주요섭의 ‘인력거군’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욱 비참한 하층민의 생활상을 그린 소설에 당시 서울의 종묘와 동대문 등지에 거주하던 토막민을 소재로 삼아 이효석이 쓴 ‘도시와 유령’이란 작품이 있다. 당시 서울 변두리의 하천제방, 산기슭, 다리 밑, 공동묘지 등에는 도시 빈민들과 농촌에서 올라온 빈민들이 굴을 판 후 그 속에 멍석을 깔고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토막민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이러한 토막민들은 이효석이 ‘도시와 유령’을 쓰던 1928년경 서울에만 5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으며, 이들의 생활상은 주거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울음소리를 두고 사람들이 귀신이 출몰하는 모습이라 생각할 정도로 비참했다.

일제 치하에서 유이민(流移民) 집단의 다수를 구성한, 그 수가 가장 많았던 부류는 소작인이었다. 당시 가난의 대명사였던 이들 소작인이 겪은 수탈의 정도와 가난의 실상은 우리가 농민소설이라고 부르는 작품들 속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힘은 벼 두 섬 값만 못하였다. 부친의 실성과 모친의 기절과 오빠의 울음과 또는 ‘서울댁’의 무서운 눈도 벼 두 섬의 힘만은 못하였다. (…) 벼 두 섬은 부친을 미치게 하고 딸의 가슴에 못을 박고 모친을, 오빠를 영원히 슬프게 하고도 남았다. (…) 그리하여 열여섯 살이나 먹도록 곱게 키워 논 남의 외동딸을 박주사 아들은 다만 벼 두 섬으로 뺏어갈 수 있었다.” 이기영은 이처럼 ‘민촌’에서 어떤 아름다운 꿈과 희망도, 추상적인 윤리나 인정도 생존을 위협하는 가난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아파 눕고 집안 식구가 굶주림에 시달리는 처지 때문에 속절없이 벼 두 섬을 받고 팔려갈 수밖에 없는 점순이의 처지를 이기영은 위에서 보듯 격렬한 어투로 대변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참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채만식은 그의 가장 뛰어난 소설 ‘태평천하’에서 윤직원 영감의 말을 빌려 역설적인 어투로 다음처럼 외쳤다.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들이 있더냐? (…) 자 보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정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하여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하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하는 것이여, 태평천하!”
▼ 님과 초인, 봄과 별… 저항시의 키워드
말 못할 조국의 현실 빗대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 ‘광야’에서)

일제강점기 우리 문학에서 ‘저항시’라는 장르는 도드라진다. 시어는 감각적이고 함축적이어서 다른 장르에 비해 저항의 정치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문인 중에는 강렬한 저항의식을 담은 시편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는 시인이 적지 않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비극적인 역사로도, 종교적인 의미로도 읽힌다. 시인은 님이 떠나버린 슬픔을 토로하면서도,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시구를 통해 님에 대한 기대와 신념을 밝힌다. 의지적인 시 정신을 오롯이 형상화한 대목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빼앗긴 국토에 대한 상실감과 그것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이 담겨 있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면서 어둡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 흔들림 없는 자신을 세울 것임을 노래한다.

이육사는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광야’에서)뿐 아니라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청포도’에서)와 같은 시구를 통해 억압에서의 놓여남에 대한 열렬한 바람을 의인화한다. 이육사는 독립운동에 투신해 중국 베이징에서 옥사하기까지 투쟁의지를 실제 삶으로 옮긴 시인이기도 하다.

심훈은 ‘그날이 오면’에서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라는 강렬한 시어로 광복을 염원하는 시인의 격렬한 의지를 표출한다.

윤동주는 하늘, 바람, 별 같은 서정적인 시어를 골라 썼지만, 그것들이 속한 것은 ‘조국’이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육첩방은 남의 나라/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쉽게 씌어진 시’에서)라면서 조국의 현실에 아파하던 시인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에서)면서 삶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이겨 나갈 것을 다짐한다. 시인은 사상범으로 체포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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