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일제강점기의 한국과 일본]⑤문화-경제적 침탈과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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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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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 재갈물리고… 토지 빼앗자… 겨레의 얼·자본 지키기 운동

■ “조선의 정신 없애라”

여학생 일기 구실 삼아 조선어학회 29명 구속
문맹퇴치-사전 편찬해 맞서

■ 각종 법령 공포 경제침탈

회사령… 광업령… 산림법…기업-광산 등 속속 日 귀속
국채보상-물 산장려로 저항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조선어학회 수난’ 모형.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조선어학회 수난’ 모형.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제6전시관에 있는 ‘우리말의 수난과 수호’ 전시실. 입구 왼쪽 첫 자리에는 ‘조선어학회 수난 모형’이 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올해 3월 현장을 찾은 기자에게 “일제 문화 침탈의 핵심은 조선어 말살정책이었고,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일제의 침략과 탄압은 문화와 경제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민지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가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였기에 민족의 정서와 얼을 담고 있는 우리말과 글에 대한 탄압은 특히 심했다. 당시 선각자들은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과 함께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우리말 지키기와 민족교육운동 등을 통해 일제에 저항했다. 경제계에서는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민족자본의 독립을 꾀했다.》

○ “조선의 정신을 없애라”

1942년 7월,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박영희 학생의 집을 경찰이 수색했다. 영희가 2학년 때 쓴 일기장에서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는 문구가 발견됐다. 영희는 조선어를 쓰다 꾸지람을 들은 일을 그렇게 표현했지만 경찰은 일본어를 사용하다 꾸지람을 들은 것으로 몰아갔고 “일본말을 썼다고 꾸지람을 한 선생이 누구냐”고 다그쳤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1942년 9월 5일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원으로 일하던 영생여학교 정태진 교사가 끌려갔고 이후 한글학자인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 총 29명이 구속됐다. 조선어학회의 수난은 이렇게 시작됐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1942년 10월부터 패망 때까지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일제는 1910년 한국 강제병합 이후 조선교육령 개정을 통해 단계적으로 조선어 말살정책을 폈다. 1911년 1차 교육령은 각급 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정하고 조선어의 모국어 지위를 박탈했다. 우리말은 ‘조선어 및 한문’이라는 과목으로 외국어 취급을 받았다.

우리말을 연구하던 최현배 정태진 등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수난을 겪었던 회원들.
우리말을 연구하던 최현배 정태진 등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수난을 겪었던 회원들.
조선어 말살정책은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질수록 강도를 더해갔다. 1938년 4월 1일부터는 ‘조선교육령 개정령’에 따라 ‘조선어’ 과목을 아예 없애버렸다. 이어 1940년 2월 11일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을 공포함으로써 전통적인 가족제도와 함께 이름에 남아있던 우리말과 글마저 없애려 했다.

○ 민족교육운동을 통한 항거

일제의 식민지 동화교육에 조선 사회는 민족교육진흥운동으로 맞섰다.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이승훈 신채호 이동녕 등이 1907년 비밀결사로 조직한 신민회는 평양 대성학교, 정주 오산학교 등을 설립하며 교육·문화사업을 통한 실력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1920년대 대표적인 교육단체로는 조선교육회(이후 조선교육협회)와 조선여자교육회(이후 조선여자교육협회)가 있다. ‘한국인본위교육’을 주창한 조선교육협회는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을 주도하며 교육운동에 진력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순회강연과 야학을 통해 여성들의 사회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했다.

1920년대 민립대학설립운동은 독립을 위해서는 한국인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 절실하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된 운동이었다. 각 지방은 물론 해외에까지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지부를 만들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지만 일제의 조직적인 방해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민족교육은 야학을 통해서도 활발히 전개됐다. 노동 농민 아동 여자야학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며 한국어 산술 한문 미술 주산 등을 가르쳤다. 대체로 시설은 보잘것없었지만 문맹 퇴치와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공간이었다.

일제가 특히 일본어를 ‘국어’로 강조하는 언어동화정책에 치중하자 우리 민족은 조선어학회 등을 중심으로 한글 연구와 보급 운동으로 맞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언론사가 문맹퇴치를 주도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리의도 춘천교대 교수는 “조선어학회가 맞춤법 통일안(1933년)과 큰사전을 만든 덕분에 광복 직후 법조문과 교과서 등 국가의 근간이 되는 문서의 통일을 재빨리 꾀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 조사와 법령 정비를 통한 경제침탈

1910년 공포된 회사령은 누구든 회사를 설립하기 전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그 결과 전기·철도·금융 부문의 큰 기업은 일본의 미쓰이, 미쓰비시 등에 넘어갔다. 소금과 인삼, 아편 등은 총독부가 전매했다. 1919년 전체 공장의 자본금에서 일본인이 소유한 비율은 91%에 달했고 한국인의 소유 비율은 6%에 불과했다.

일제는 소유권을 확정한다는 명분으로 1910∼1918년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면서 토지를 빼앗았다. 신고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들이 신고 절차를 밟지 않아 토지를 빼앗기는 사례가 많았고, 신고주가 없는 공유지 등은 총독부 소유가 됐다. 그 결과 1930년까지 총독부가 소유한 토지는 전 국토의 40%에 달했다.

광산, 어장, 산림 등도 차곡차곡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 일본은 한국광업령(1915년)을 통해 한국인의 광산경영을 억제했고 미쓰이, 고하 등 일본 광업 자본이 들어와 인천광산 갑산광산을 차지했다. 1920년에는 일본인 소유의 광산이 전체 광산의 80%를 넘었다. 어업과 임업도 한국어업령(1911년), 삼림법(1908년)에 의해 대부분의 사업권을 일본인이 차지했다.

경제 침탈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족자본의 육성이 필요했다. 한말 일본에서 정부가 들여온 차관이 1300만 원에 달하자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차관을 상환해 경제적 독립을 이루자는 전국적인 운동이었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으며 돈을 모았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 등을 팔았다.

1920년에는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조직한 평양물산장려회를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됐다. “한국인이 만든 것을 입고, 먹고, 쓰자”는 구호를 외치며 자급자족, 국산품 애용, 소비절약운동을 펼쳤다. 전국적으로 금주단연(禁酒斷煙) 운동이 벌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대구와 평양의 내의공장과 부산의 고무신공장 등 조선인 중심의 제조업이 일부 성장할 수 있었다.

일제 경제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경성지점.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일제 경제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경성지점.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 신사참배와 종교계의 저항

일제는 한국 침략과 함께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서울 남산 기슭에 경성신사를 만든 것을 비롯해 산간벽지에까지 신사를 짓고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를 지시했다.

1909년 단군교라는 이름으로 창시된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섬기며 일제에 저항한 대표적인 민족종교였다. 대종교는 주로 만주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민족주의 교육에 기여했다. 대종교가 중심이 돼 조직한 중광단은 3·1운동 직후 정의단으로 확대 개편된 뒤 대한군정서, 북로군정서로 발전해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 같은 활동 때문에 대종교의 포교활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동학의 전통을 이은 천도교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당시 ‘멸왜(滅倭)특별기도’를 전개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데 앞장섰다. 기독교계는 YMCA, YWCA를 중심으로 농촌강습소운동을 전개했으며 함석헌 김교신 등이 1927년 창간한 ‘성서조선’을 중심으로 교계 내부의 혁신과 민족독립을 동시에 성취하려는 운동을 펼쳐나갔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 일제, 조선청년 징집 위해 일본어 보급정책 강화

중일전쟁후 청년층 대상

표창-물자보급 당근책에도

저항 커 22%만 습득 그쳐

“훌륭한 군인을 만들기 위해 국어(일본어) 생활을 실행하자.”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일본어 보급정책을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했다. 조선 청년을 강제로 전장으로 끌고 가는 징병제는 조선 청년의 완전한 ‘황국신민화’를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말 일제가 일본어 보급정책을 강화한 큰 이유는 조선 청년을 주요 병력자원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제3차 교육령 개정을 통해 일본어 상용화를 강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8년에 일제가 수립한 10년간의 국어(일본어)강습회 계획은 11세 이상 30세 이하의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전 계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가정마다 한 사람씩 대상자를 선정하되 학습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우선 대상이었다. 징병, 징용 대상자인 청년층에 대한 일본어 보급을 노린 것이다.

징병제를 발표한 1942년을 전후해 일제는 국어전해(全解·모두 이해하거나 해석함)운동과 국어상용운동을 통해 일본어 보급에 나섰다. 전해운동의 대표적 방법은 표창장 수여였다. 일본어 능력을 구비한 사람은 ‘국어전해 마크’를 착용하도록 했다. 취학 연령이 된 아동의 가정을 조사해 일본어를 제대로 해득한 가정의 학생을 우선 입학시키는 방식으로 경쟁심을 유발했다.



일 본어 교육은 물자 배급과도 연결됐다. “국어강습회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물자 배급을 중지하라”거나 “속히 국어전해에 도달한 가정에 대해서는 물자 배급 등에 상당한 배려를 하라”는 지시가 나돌았다. 강습회에 참석하지 않거나 일본어 습득에 소극적인 사람은 경찰서로 호출돼 훈계를 받았다.

일본어 상용화를 위해 일제는 업무시간에 일본어 사용을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과태료도 부과했다. 또 사회불안 예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한글 출판물이나 조선어로 제작된 영화 연극 방송 등을 금지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도 높은 일본어 보급 계획에도 불구하고 1943년 대만의 일본어 해득률이 62%였던 데 비해 조선은 22%에 그쳤다. 일본어 사용 확대에 대한 민족적 저항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의 종주국이라는 망상에 잡혀 일본어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우리말과 글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하게 진행됐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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