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한번 안 뽑고 세상의 불의를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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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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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
창작극 ‘칼집 속에 아버지’ ★★★★☆

무협지의 서사구조를 빌려오면서 꿈(정신분석학)과 신화(인류학)의 교직을 통해 인간 구원의 묵직한 주제의식을 형상화한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 칼을 쥔 주인공 갈매 역의 김영민이 그의 아비 찬솔아비와 연쇄살인마 검은등의 1인 2역을 맡은 김정호와 아비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는 어미 아란부인과 검은등의 먹잇감인 초희의 1인 2역을 맡은 박윤정 사이에서 울먹이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무협지의 서사구조를 빌려오면서 꿈(정신분석학)과 신화(인류학)의 교직을 통해 인간 구원의 묵직한 주제의식을 형상화한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 칼을 쥔 주인공 갈매 역의 김영민이 그의 아비 찬솔아비와 연쇄살인마 검은등의 1인 2역을 맡은 김정호와 아비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는 어미 아란부인과 검은등의 먹잇감인 초희의 1인 2역을 맡은 박윤정 사이에서 울먹이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7년간 강호를 떠돌았지만 칼집 속 칼을 단 한 차례도 빼보지 못한 무사…. 연극의 구상을 접하고 1980년대 말 유행했던 ‘외팔이 무사’ 유머 시리즈가 떠올랐다. 외팔이 신세로 깊은 산속에서 10년간 두문불출하고 온갖 무공을 익힌 주인공이 아비의 원수를 갚으러 하산하는 길에 사소한 실수로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는 농담들 말이다.

실제 ‘칼집 속에 아버지’(고연옥 작, 강량원 연출)에는 그런 유머 코드가 도처에 깔려 있다. 위대한 무사 찬솔아비(김정호)가 시체로 발견된다. 하필이면 변소에서. 엄숙한 복수를 수행해야 할 외아들 갈매(김영민)는 “원한이나 갚으며 살고 싶지 않다”면서 투정을 부린다. 7년 세월을 떠돌아도 원수를 못 찾은 그는 노상강도(박완규)에게 “나의 원수가 되어 달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칼집에서 칼을 뽑아 자신이 무사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된 순간 그는 무사들과의 싸움을 피하려 손바닥 뒤집듯 자신의 아비를 부인해 버린다.

이 반(反)무협극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전설의 주먹’의 대척점에 서있다. ‘전설의 주먹’이 남자들의 아드레날린 가득한 환상에 서사의 날개를 달아준다면 ‘칼집 속에 아버지’는 그 남성적 환상이 은폐, 억압하는 핏빛 현실의 폐부를 매서운 농담의 칼끝으로 찌른다.

흥미로운 점은 그 농담이 꿈과 신화의 형식으로 펼쳐진다는 점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주인공 갈매는 항상 누워 잠들었다가 중간에 깨어난다. 하지만 이야기는 어느새 현재와 과거, 장소와 인물,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꿈의 문법을 따라간다.

현실의 갈매가 전형적 마마보이라면 꿈속의 갈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화신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억압한 아비를 미워하다 못해 살의까지 느낀다. 어미는 그런 갈매의 양심을 채찍질하는 훈육자인 동시에 한없이 흔들리게 만드는 유혹자다.

신화적 서사도 가득하다. 천사들의 전쟁에서 희생당한 천사의 갈가리 찢긴 몸뚱이에서 무사들이 태어났다거나 신의 축복과 악마의 저주를 동시에 받은 존재가 세상의 지배자가 된다는 잠언이 넘쳐난다. 갈매에겐 그 지상의 악을 끝장내고 세상을 구원할 ‘최후의 무사’라는 영웅설화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현실의 갈매는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고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는 어린이에 불과하다. 칼집에서 칼 한 번 뽑아보지 못하는 이 반(反)영웅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극작가 고연옥은 여기서 자신의 연극 속 단골손님인 연쇄살인마를 불러낸다. 마을 처녀와 혼례를 올리고 난 뒤 싫증난 신부를 죽이고 다시 다른 처녀와의 혼례와 장례를 거듭하며 백 살 넘게 산 검은등(김정호)이다. 검은등이 다스리는 마을에 흘러든 갈매는 검은등의 새 신부로 점지된 초희(박윤정)를 구하려고 그 소굴에 뛰어든다.

드디어 칼을 뽑아 든 갈매에 맞서는 검은등의 무기는 놀랍게도 꿈이다. 검은등의 주술에 걸린 갈매는 자기 연민의 깊은 악몽에 빠져든다. 자신의 운명을 회피하고 싶은 유아심리, 어미에 대한 금지된 욕망, 아비에 대한 동정심과 죄의식이 뒤섞인 감정….

거기서 빠져나올 길은 하나뿐이다. 자기 연민의 꿈에서 스스로 깨어나는 것. 그것은 아비의 원수가 아니라 자신을 억압하는 아비의 그림자와 맞대결하는 것이고 그 그림자에 가위 눌린 자신의 망아(忘我)를 칼로 베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갈매의 칼집에서 나온 칼은 자기 자신을 베고 초희를 구원한다. 그런 자기희생을 통해 아비의 복수도 완성된다. 한국 사회의 폭력 문제를 천착해온 극작가 고연옥은 이렇게 정신분석과 신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구원의 출구를 발견한다. 구원은 날선 칼(남성성)에 있는 게 아니라 텅 빈 칼집(여성성)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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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까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 민호극장. 1만∼3만 원. 1688-596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칼집 속에 아버지#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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