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20선]<4>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 입력 2008년 8월 29일 02시 58분


◇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주강현 지음/웅진지식하우스

《“(일본의) 촌구석이었음에도 일찍이 바다로 열려진 창구를 이용하여 힘을 키우고 그 힘으로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었으니 바다를 통한 힘의 축적 과정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다를 배척한 조선, 바다를 개척한 日

“(일본의) 촌구석이었음에도 일찍이 바다로 열려진 창구를 이용하여 힘을 키우고 그 힘으로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었으니 바다를 통한 힘의 축적 과정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륙의 일부인가, 바다의 일부인가.

‘관해기’ ‘적도의 침묵’으로 해양문화사에 대해 탁월한 해석을 선보여온 작가는 이 선택이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1543년 8월 25일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 앞 섬 다네가시마에 낯선 외국인들이 상륙했다. 이들은 남만국 상인들. 도주(島主)는 이들이 가진 물건 중 총에 흥미를 느껴 구입한 뒤 고스란히 복제해 임진왜란에서 이용한다.

저자는 100년 뒤 조선에서 일어난 일화를 대비시킨다.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들이 오자 조선의 조정은 이들을 조사한 뒤 출국을 금지하고 군사도감에 배치한다. 저자에 따르면 조정은 이들에게서 고급 군사 지식을 얻기보다 단순 노동을 시켰다. 이들을 18년 동안 억류하고 있었지만 이들로 인해 일어난 변화는 없었다.

저자는 하멜 일행의 목적지가 나가사키였을 정도로, 일본은 상당한 수준으로 세계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그 통로는 바다였다.

명, 청이라는 거대 대륙이 막고 있는 육로는 다른 문화와의 소통에 걸림돌이었지만 경계가 없었던 바다는 지식과 자본이 자유롭게 오가는 소통로였다. 결국 이 소통로를 받아들인 일본은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양국의 역사는 19세기에 극단적으로 갈린다.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이때도 통로는 바다였다. 저자는 19세기 일본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메이지유신의 주역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인물과 사회 상황을 사료와 그림, 사진을 통해 보여준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공통점은 바다를 인접하고 있다는 것.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은 바다를 통해 해외 세력과 접촉했고 곧 중앙의 막부를 능가할 힘을 얻는다. 일본에서도 변방인 사쓰마번이 강대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후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쿠보 도시미치 등도 사쓰마와 조슈번 출신이다. 저자는 이들이 근대화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해양을 통해 외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일찍 눈을 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비록 이들은 정한론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첨병의 역할을 했지만, 그 힘을 축적한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의 상황은 또 대비된다. 청의 간섭 때문에 일본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기는 했으나 저자가 보기에 조선은 사고(思考) 자체가 일본과 달랐다. 일본이 해양을 진출의 통로로 생각한 데 비해 조선은 해양을 방어벽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 조선은 확장은커녕 본토 밖 거문도나 독도 등 주요 섬들을 지키는 것도 버거웠다. 조선 숙종 때 에도의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약받았던 안용복과 성종 때 울릉도를 개척했던 김한경은 월권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심문당하고 극형에 처해졌다.

저자는 발상의 근본을 바꿔야 한다며 한반도 주변의 지도를 거꾸로 보여준다. 한반도의 북쪽이 남쪽을 향하고, 그 아래 만주와 시베리아가 있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는 대륙보다 해양(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통로가 된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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