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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미술&소통]1초를 모아 生을 짜깁다

입력 2010-12-07 03:00업데이트 2010-12-07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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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다. 잉그리드 버그먼, 메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등 은막 스타부터 프랭크 시내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등 전설적 가수까지 한자리에 모아놓았다. 카우보이가 등장하는 고색창연한 흑백 서부극에서 멜로 스릴러 로맨틱코미디 액션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주류지만 가끔은 유럽과 아시아 영화 속 이미지가 등장하는 영상 3부작을 선보이는 ‘크리스천 마클레이(사진): 소리를 보는 경험(What you see is what you hear)’전은 미술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흥미진진한 전시다.》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시각적 요소를 중시하지만 작가는 음향을 전면에 내세워 소리를 중심으로 수백 편 영화에서 원하는 장면을 뽑아내 자기만의 영상으로 재편집했다. 그 이음새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관객이 작품과 대면하는 순간 몰입을 이끌어낸다.

9일부터 내년 2월 13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렘 콜하스가 미래적 전시공간으로 설계한 ‘블랙박스’의 첫 프로젝트이자 미국 작가 마클레이 씨(55)의 국내 첫 개인전. 활동 초기부터 음향에 관심을 가져온 작가는 디제잉 퍼포먼스처럼 레코드 음반의 소리를 뒤섞은 즉흥 음악을 시도하고, 음반 표지와 악보로 만든 오브제 작업,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을 편집한 영상 작업을 해왔다. 한국에선 생소한 이름이지만 ‘보는 것을 들을 수는 없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국제적 아방가르드 예술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다.

전시에 나온 ‘전화’ ‘비디오 사중주’ ‘시계’ 등 영상 3부작의 매력과 개성이 각기 달라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다. 뛰어난 영상과 사운드가 시각과 청각을 아우르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체험을 선사해 영화와 음악에 관심 있는 이들도 두루 즐길 만하다. 11일 오후 4시 작가와의 만남도 마련돼 있다. 02-2014-6901

○ 소음과 음악의 구분은 가능한가

그의 작업에선 존재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콜라주 기법이 핵심이다. 영상작업도 직접 촬영한 영상이 아니라 기존 영화를 편집해 만들었다. 마른 몸매, 차분한 인상의 작가는 “영화의 어휘를 내 작업의 언어로 사용한다. 영상 속에서 사운드는 서로 다른 요소를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007시리즈부터 ‘화양연화’까지 숱한 영화를 점프컷(연속성이 갖는 흐름을 깨뜨리는 기법)으로 이어붙인 영상에선 앞뒤 화면의 소리가 맞아떨어지고 등장인물의 시선 처리도 매끄럽다. 영화 편집에서 작가가 달인의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양한 영화의 장면을 편집해 자신만의 영상을 만들어 내는 크리스천 마클레이 씨의 신작 ‘시계’. 시간이란 주제를 탐구한 작품으로 무수한 영화에서 시계가 시간을 가리키는 장면, 대화 속에 시간이 언급되는 장면을 이어 붙여 하루 24시간을 실시간으로 재현했다.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전화’(1995년)는 영화를 소리의 조각으로 나누어 편집한 그의 첫 작품. 배우들이 다이얼을 돌리고, 벨이 울리고, 통화하는 과정을 7분 30초 영상에 조각조각 이어 붙였다. 그의 대표작인 ‘비디오 사중주’(2002년)는 700개 이상의 영화 필름을 편집해 4채널 영상으로 결합한 작품. 14분 동안 4개 화면에서 배우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고함을 지르는 등 음악과 음향을 치밀하게 교직한 거대한 사운드가 쏟아진다. 기존의 사운드로 작가가 새롭게 작곡한 심포니 같은 화음을 보고 듣는 사이 관객은 소음과 음악을 구분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돌아보게 된다.

○ 시간의 흐름을 느껴본 적 있나

하루 24시간을 영화 속 장면으로 재현한 24시간짜리 대작 ‘시계’는 10월 런던의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처음 공개한 작품. 영화 속에 나오는 시계, 시간이 언급되는 대사를 촘촘하게 이어 붙여 다 보려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상영도 실시간으로 하기 때문에 오후 4시 전시장에 들어섰다면 영상 속 시계도 정확하게 오후 4시를 가리키며 관객이 작품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작가는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하는 시간을 다룬 작품으로 2년간의 작업 끝에 완성했다”며 “시계의 노예로 사는 현대인에게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누구나 24시간을 살면서도 1분의 의미를 인식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똑딱똑딱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무수하게 비추는 영상. 언제나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지금 이 순간’뿐임을 일깨워준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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