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권지예의 그림 읽기]꿈은 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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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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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ass-scape, oil on canvas, 최경문. 아트블루 제공
glass-scape, oil on canvas, 최경문. 아트블루 제공
몹시 추웠던 어제, 저는 모르는 이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택배기사가 전해주고 간 박스에 적힌 이름과 주소를 보고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박스를 여니 한지공예로 만든 등이 나왔어요. 등피의 한지에 단풍잎을 여러 장 곱게 붙인 아름다운 등이었습니다. 은은히 비치는 한지도 정갈하고 아름답지만 멋지게 구성하여 붙인 단풍잎들의 색깔이 초록색부터 노란색 주황색 선홍색 적갈색 등 오색(五色)이어서 더 인상적이었어요. 등을 만든 분이 아마도 단풍나무 아래에서 한 해 내내 색이 변하는 단풍잎을 주워서 갈무리했을 것 같은, 기다림과 정성이 느껴져 더 감동적이었어요.

박스 밑바닥을 살펴보니 얇은 과월호 월간 수필 문예지 한 권과 출력된 A4용지 두 장, 그리고 손글씨로 적은 편지 한 장이 나왔습니다. 그 수필 문예지는 몇 년 전부터 제가 격월로 에세이를 연재하는 잡지인데, 2년 전에 수필 공모에서 당선된 그분의 등단작이 거기에 실려 있더군요. 그런데 저는 등단 신인 작가인 그분의 약력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팔순이 훌쩍 넘은 신인이셨어요!

고풍스러운 필체의 편지에서 그분은 잡지에서 제 글을 자주 봤다며 손이 아픈 것도 모르고 이 등을 만들었다고 쓰셨습니다. 그러며 마지막에 ‘늘 곁에서 불 밝히며 사랑받았음 좋겠습니다’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까마득한 인생 선배지만 신인 작가이기도 한 그분의 등단작을 읽었습니다. 72년 전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봄소풍에서 찍은 빛바랜 사진으로 서두를 연 길지 않은 글. 감수성 풍부한 한 소녀가 굽이굽이 인생길의 고비를 넘어오면서도 문학의 꿈을 잃지 않고 살아온 소회를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꿈을 향해 달리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마무리하셨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꿈까지 늙지는 않았다고.

출력해서 보내준 글에는 이분이 풀잎이나 야생화나 낙엽 등을 그대로 눌러 말려서 여러 가지 생활용품에 응용하여 지인들에게 기쁘게 선물을 하시는 모습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압화(押花), 우리말로 ‘꽃누르미’라고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꽃누르미라는 단어,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생생하고 아름다운 꽃은 시간이 지나면 시듭니다. 꽃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위해서 화가들은 정물화를 그려 그 생기의 순간을 영원에 매어 두기도 합니다. ‘꽃누르미’도 아름다움을 연장하는 한 방법이겠지요.

위의 그림 속의 생생하고 아름다운 꽃은 마치 투명한 얼음에 냉동 보관되고 있는 것 같지요? 인간도 젊음과 청춘을 어딘가에 냉동 보관했다가 조금씩 녹여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제목은 ‘유리풍경’이라고 합니다. 제 눈에 얼음으로 보이는 이것은 유리인가 봅니다. 하긴 우리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보관할 때 유리병을 쓰긴 합니다.

저는 예술, 문학이라는 행위가 유한한 삶의 어느 생생한 순간을 무한으로 남기는 신성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의 영혼은 작품을 통해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여든이 넘은 신인 작가인 그분의 꿈은 늙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청춘일 겁니다. 그분이 오래도록 꽃처럼 향내 나는 글을 쓰시길 바랍니다.

오색 단풍잎 등을 켜봅니다. 등 안의 전구 불빛 때문인지 밝은 햇살을 받은 양 단풍잎이 눈부시게 되살아납니다. 등불이란, 안의 불이 켜졌을 때에야 아름다운 존재를 증명하는 물건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 또한 내면의 불인 꿈을 잃지 않아야겠습니다.

권지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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