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청소년 심리]백만장자의 고통 그린 ‘에비에이터’

  • 입력 2007년 11월 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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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욕실에서 어린 아들의 몸을 비누로 문지르며 “Q-U-A-R-A-N-T-I-N-E”(검역)이란 단어를 천천히 말하면 아이는 스펠링을 반복한다. 영화 제작자이자 항공사 사장인 하워드 휴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에비에이터’의 첫 장면이다.

그는 백만장자였지만 평생 감염 공포 강박증으로 인해 고통 속에 산 사람이다. 조그만 비누통과 크리넥스 티슈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심리적 감옥에 갇혀 있었다.

“너는 안전하지 않아”라고 속삭이는 어머니에게 “나는 세계 최고 부자가 될 거야. 나는 세계 최고 영화를 만들 거야”라고 말하는 휴스. 그의 불안과 강박증상의 중심에는 감염 공포 강박증을 지닌 어머니가 있었다. 그는 불안에 휩싸일 때마다 주문을 외우듯 “QUARANTINE”이라고 되뇌면서 손이 벗겨져라 비누로 씻고, 화장실 손잡이를 잡지 못해 다른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감염 공포로 인해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나가지 않아 방 안은 온통 그가 쓴 휴지로 가득 차기도 했다.

휴스가 비행사들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고 비행기 조종을 즐겨한 것은 아마도 그를 얽어매는 강박 증상으로부터 벗어나 훨훨 날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강박장애 환자들은 사소한 부분에 집착해 전체를 보지 못한다. 나무는 보지만 결코 숲은 보지 못하는 격이다. 휴스도 하늘에 올랐을 때만 숲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강박 행동의 이면에는 실수로 발생할지 모를 파국적인 결과를 예방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 강박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강박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멈추고 싶어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심한 무력감이나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냥 난 두려워. 미칠까봐 말이야”라고 말하는 휴스처럼.

프로이트는 강박증상이 공격적이거나 성적인 충동을 과도하게 방어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기제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았다. 최근에는 유전적, 신경학적 요인으로 강박장애를 설명한다. 뇌영상 촬영을 통해 강박장애 환자들은 전두엽에 기능장애가 있다고 확인됐다. 영화에선 휴스의 강박증상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유전적 요인이 아니더라도 부모의 잘못된 양육 방식이 자녀에게 강박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

강박적인 성향을 가진 아이들의 부모는 대개 매사에 엄격하고 통제적이다. 앞으로 닥칠지 모를 위험에 대해 늘 걱정하고 경계하며 빈틈없이 대비하도록 교육한다. 휴스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너는 안전하지 않아”라고 속삭였듯이 말이다. 이 때문에 휴스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제한하고 기능을 마비시키는 무의미한 규칙, 청결함, 완벽함을 추구하느라 쉴 곳이 없었다. 100%의 안전과 완벽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부모는 아이들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신민섭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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