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19>뿌리 깊은 나무

  • 입력 2007년 7월 30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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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세종의 학사들을 죽였나?

이정명 씨의 ‘뿌리 깊은 나무’는 근래 쏟아지는 국내외 팩션(faction) 중 돋보이는 소설이다. 세종 시대 경복궁에서 일어나는 집현전 학사 살인사건을 파헤친 이 소설은 ‘한국의 다빈치 코드’라고 부를 만하다. 연쇄살인을 추적하는 짜릿한 스릴과 절묘한 트릭은 물론이고,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궁궐 배치의 정치적 코드와 한글 창제의 원리를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경복궁 후원의 우물에서 젊은 집현전 학사의 시신이 발견되고, 이후 매일 밤 학사들이 연쇄적으로 죽어 나간다. 소설은 참혹한 연쇄살인의 이면에 감춰진,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프로젝트인 한글 창제 추진파와 이에 맞서는 반대파 사이의 대립과 음모를 치열하게 그려낸다.

살인사건을 맡은 겸사복(궁궐 수비군)인 주인공 강채윤은 색다른 매력으로 독자들을 사건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그는 셜록 홈스나 미스 마플과 같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인물이 아니다. 뛰어난 지력도, 매력적인 외모도 지니지 못한 그는 살인범을 눈앞에 두고도 체포할 수 없는 말단 궁궐 수비병일 뿐이다. 독자들은 어리고 약하지만, 검은 세력의 위협에 굴하지 않는 그의 고군분투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세종 또한 기존 이미지와 다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조선을 명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로 우뚝 세우려는 비밀결사의 수장이며, 양반들이 독점한 문자권력을 모든 백성들에게 널리 펴고자 하는 개혁가이다. 단서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세종과 젊은 집현전 학사들이 주도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고, 치열하게 전개되는 반대파의 검은 음모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연쇄살인을 풀어 가는 추리의 스릴이 이 책의 첫 번째 재미라면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역사와 문화의 비밀을 찾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소설 속에는 열상진원, 향원정, 경회루, 강녕전, 아미산 등 경복궁에 남아 있는 수많은 건축물에 숨어 있는 놀라운 상징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열쇠로 작용한다. 마치 ‘다빈치 코드’에서 루브르를 비롯한 배경 건축물들의 상징으로 사건이 풀리는 것과 같다. 음양오행의 동양철학을 비롯해 수학 미술 음악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도 사건을 해결하는 핵심 트릭으로 작용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 속에 우주 창조의 원리가 내재해 있으며, 백성들의 마음에 ‘사맛디(소통하지)’ 아니하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라는 세종의 생각을 느낄 때쯤 소설은 놀라운 반전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경복궁을 오래된 빈집들의 썰렁한 집합처가 아니라 수많은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보물 창고로 다시 보게 한 것 또한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이번 여름에는 우리도 몰랐던 우리 역사의 눈부신 전율 속으로 빠져 보는 것이 어떨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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