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허구를 뒤섞으며 탄탄한 역사 지식에 추리 소설의 기법을 가미한 역사추리소설이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매슈 펄의 ‘단테클럽’,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모두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을 미로게임처럼 풀어나가는 재미와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놀라운 진실, 그리고 당시의 사회 정치 종교 미술 문학에 대한 심도 있는 지식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 대표적 역사추리소설이다. 우리에게는 왜 그런 수준 높은 역사추리소설이 없을까 탄식하는 독자들에게 ‘방각본 살인사건’은 반가운 책일 것이다.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던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과 그 사건에 뛰어든 젊은 의금부 도사,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음습한 비밀과 정치적 음모는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러나 소설과 소설 쓰기를 살인사건의 직접적 원인으로 설정하고 문학과 정치를 능숙하게 뒤섞음으로써, 작가는 더욱 세련된 지적 즐거움의 세계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당대 조선사회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도 작품에 무게와 신뢰를 부여해 주며 풍부한 교양과 각별한 재미를 제공해 준다.
소재만 가지고는 자칫 당파싸움과 권력을 둘러싼 암투에 대한 통속적인 이야기로 그쳤을 수도 있는 이 소설을 작가는 뛰어난 예술적 장치와 심도 있는 주제의식을 통해 한 편의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변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작가가 당시 혁신적인 신(新)장르인 ‘소설’에 대한 지배계급의 배척과 서민의 매료를 대비시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대설(大說)-소설(小說), 정통-비정통, 북벌파-북학파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한 양반 고위 관리는 소설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양반과 중인과 천민이 한데 어울려 놀고, 먹고 마신다는 게야. 그 만남을 아름답다 이르고 그 사귐을 귀하다 여기는 매설가도 있다더군. 세상을 미혹하는 데 소설보다 더 좋은 수단이 있겠는가.”
김성곤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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