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5>황금빛 모서리

  • 입력 2007년 10월 1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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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이탈한 자가 문득’ 중에서》

어떤 책은 20대에 읽어야 제 맛이 난다. 그런 책을 뒤늦게 만나면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든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많지 않지만 내가 20대였던 시절에는 생일 선물로 시집을 주고받았다. 책 앞장에 약간은 치기 어린(그러나 비장한) 글을 적어서. 3000원이 생기면 자동으로 시집이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인데 이상하게도,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김중식 시인은 “그래도 한때는 최선을 다해 방황했다”고 고백한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선물했던 많은 시집을 떠올렸다. 그중 어느 시집의 앞장에 나도 그런 문장을 적었던 것이다. 시집을 읽은 후 나는 다시는 “최선을 다해 방황했다”는 문장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건 내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허영이었다. 나는 ‘니네들은 못 해본 단식을 나는 해보았다는 허영/나도 내가 징그러워졌다’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내 허영은 시인의 허영에 훨씬 못 미쳤지만, 시집을 읽는 동안 나도 내가 징그러워졌다.

‘매 맞고 뒹굴수록 내 혓바닥에 독을 키우는 것만이 내가 사는 것임을 알게 하였노라. 발등에는 독버섯을, 썩은 겨드랑이와 배꼽털에는 찢기면 찢길수록 놈들의 이마에 엉기는 거미줄을 걸어놓게 하였나니 나를, 더욱, 그늘지게 해다오.’(‘城(성)에서’) 누구나 자기 몫의 삶의 무게가 있다. 그림자처럼, 삶의 무게는, 낮게 포복한 채로 들러붙어 있다. 우리가 읽고, 웃고, 울고, 달리고, 노래하는 이유는 그 무게에 짓눌려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기 몫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시인이 있다. 그는 말한다. 더욱, 더욱, 그늘지게 해 달라고.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그늘이 된다.

세상 모든 것의 그림자를 껴안고 그는 사막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같이 헤매자는 연대감’을 위해 ‘낙타를 두 번 죽인’다. 그러고는 ‘제 삶을 放牧(방목)시킨 유목민’이 된다. ‘살아 있음의 유일한 증거는 우리가 밖으로 피해 버린 사이에 안에서 불타버리곤 하였’으니까. ‘사람을 벗어나면 외롭지 않’으니까. 그러니 스스로 유목민이 되어 ‘모래를 구워 만든 門(문)을 향하여’ 걸어갈 수밖에. 가끔 그림자를 만들어 주는 새를 보고 ‘발목이 퇴화할 때까지’ 날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가 시집을 내고 오랫동안 침묵했을 때, 나는 ‘버터플라이 泳法(영법)’으로 사막을 가는 고행자를 떠올리곤 했다. 사막은 넓으니 아직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그러나 어서 돌아와 이런 말을 더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말이 안 통해서 병 대신 병적인 것, 아픔 대신 아픔적인 것, 애인 대신 애인적인 것에서 우리는 위안받는다/말이 안 통해서 우리는 상처 없는 아픔과 절망 없는 고통을 하고 싶어 한다.’(‘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엄살 피우기 싫어서, 벽을 바라보며 독백하기 싫어서, 나는 그의 시들을 기다린다.

윤성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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