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4>토지-박경리

  • 입력 2005년 7월 22일 0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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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구용(金丘庸)은 서울에 이괴(二怪)가 있으니, 북에는 박경리요 남에는 손창섭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괴란 범상치 않음이리라. 필자가 여기에 대구를 맞추어 본다면, 한국에 이대가(二大家)가 있으니, 남에는 박경리요 북에는 최인훈이다.

박경리는 통영, 최인훈은 회령이 고향인 두 사람은 반도의 남북 쪽 끝 태생이다. 두 사람의 문학은 모두 전쟁으로부터 발원해(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최인훈의 ‘광장’),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초극하는 문학(박경리의 ‘토지’, 최인훈의 ‘화두’)을 창조하려 했다.

박경리 선생은 지금 원주 근교에서 밭을 일구며 살고 있는데, 어느 산문에서 그 뜻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은 ‘자투리 시간이 아니라 두루마리 같은 시간을 쓰고 싶었다’고 쓰고 있었다. 이 두루마리 같은 시간이라는 말은 박경리 문학의 본질에 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가로로 길게 이어 둘둘 말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이 두루마리는 시간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그는 단절 없이 이어진 이 시간과 초인간적인 의지로 ‘토지’를 썼다. 이것은 박경리 선생이 ‘토지’라는 이야기 속 시간으로 한국근대사라는 역사 속 시간에 맞서서 이를 초극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도 아래서 써나간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쓰인 장편 대하소설로 구한말로부터 해방기에 이르는 민족 수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3만 장이 넘는 기다란 원고지 피륙 위에 수놓아 나간 대작이다. 이 속에는 신분이 다른 결혼을 한 서희와 길상이를 비롯해 숱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고 또 새로운 인물이 그 삶을 ‘반복’해 이어간다. 최근에 나온 ‘토지’와 관련한 한 논문은 “‘토지’의 놀라운 힘 가운데 하나가 끊임없는 등장인물을 증식해 내는 창조력”(김은경)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 자신이 타고난 운명과 맞싸우는 것이다. 실로 박경리 처럼 운명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문제를 그토록 집요하게 다루어온 작가도 드물다. 그의 장편소설 가운데 일반에 널리 알려진 ‘시장과 전장’이나 ‘김약국의 딸들’ ‘파시’의 여성 주인공들은 모두 운명이라는 거대한 초인간적 힘 앞에서 서 있는 문제적 인간들이다.

‘토지’는 이러한 운명의 힘과 그것에 맞서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지극히 다채롭고 풍부하게 묘사해 나간다. 경상도 하동 평사리에 군림해 온 최참판댁의 혈육으로, 쓰러진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서희, 이 집안의 머슴 출신으로 서희와 결혼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등 변모를 거듭해 가는 길상, 소작인의 딸 용이와 무당의 딸 월선이, 서희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후 방황을 거듭해 가는 상현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의 형상은 조밀하게 직조된 커다란 피륙을 이룬다.

‘토지’는 식민지 시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심층적 의미는 특정한 시대와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토지’는 인간에 의해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가 하는 한계를 시험하는 두루마리요 피륙이고 거대한 벽화인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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