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청소년 역사강좌]제8강 ‘戰後 1950년대 다시보기’

  • 입력 2004년 11월 22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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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 둘러싸인 李 前대통령1957년 5월 경무대를 방문한 어린이 기자단에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이 대통령은 6·25전쟁이 끝난 다음 해(1954년) 의무교육 6년제를 단행하고 전 내각을 동원해 25만개의 국문보급반을 운영하는 등 대대적인 문맹퇴치운동을 펼쳤다. 이는 민주주의의 문화적 토대를 쌓았고 결국 그 자신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부메랑효과를 낳았다. -대한민국 정부기록사진집
어린이에 둘러싸인 李 前대통령
1957년 5월 경무대를 방문한 어린이 기자단에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이 대통령은 6·25전쟁이 끝난 다음 해(1954년) 의무교육 6년제를 단행하고 전 내각을 동원해 25만개의 국문보급반을 운영하는 등 대대적인 문맹퇴치운동을 펼쳤다. 이는 민주주의의 문화적 토대를 쌓았고 결국 그 자신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부메랑효과를 낳았다. -대한민국 정부기록사진집
《한국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가장 암울한 시기로 기억된다. 6·25전쟁의 참혹한 기억뿐 아니라 전후(戰後)의 빈곤과 부패, 독재로 얼룩진 시대로 낙인찍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후 1950년대 다시 보기’를 주제로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에서 ‘2004 청소년 역사강좌’ 제8강 강연을 펼친 전상인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1950년대는 현재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세계화의 역사적 모태가 형성된 시기로 재발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국현대사의 원점

세계의 재앙을 연구해 온 미국의 해롤드 포스터는 6·25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세계사 제4위의 대재앙이라고 규정했다. 남북한 전체 사망자는 150만∼400만명으로 추정되고, 남한 제조업 시설의 42%가 파괴됐으며, 남한인구의 20∼25%가 기아에 직면했다. 또 불안과 공포, 불신이 팽배했고 ‘우리가 못나서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는 패배의식과 열등감이 만연했다.

이러한 점에서 전후 1950년대는 원점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하고 국민의식을 형성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 당시 8개 사단 10만명에 불과했던 상비군이 종전 후인 1954년 20개 사단 65만명으로 현재 한국군의 체제를 갖췄다는 점은 강력한 국방력 확보라는 차원에서 놀랄 만한 변모다. 또 이 시기에는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통해 국민통합이 이뤄졌고 현재까지도 국민이 가장 지지하는 미국식 대통령중심제가 확립됐다.

● 사회변동과 교육기적

이 시기 한국사회는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된다. 우선 1958년 농지개혁의 완결로 양반지주제가 몰락했고 전쟁을 통해 전통적 문인우위 체제가 와해되면서 사회적 평등이 확산됐다. 또 산업화의 진전보다는 농촌 피폐로 인한 이농 때문에 도시인구가 374만명(1949년)에서 700만명(1960년)으로 늘면서 도시화가 급진전했다. 매스컴, 특히 신문보급이 1946년 38만부에서 1955년 198만부로 늘면서 도시민들의 비판의식이 강화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3세계 지도자 중 교육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았다. 이 대통령의 담화를 분석했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국가안보였고 둘째가 교육이었다. 당시 예산 수준으로 1954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6년에 걸친 의무교육을 단행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로 인해 1945년 80%에 이르던 문맹률은 1958년 4.1%로 급감했다. 이는 4·19혁명 등 민주화의 문화적 토대가 됐으며 1960년대 경제개발의 인적자본이 됐다.

● 기독교의 부상과 경제개발의 시동

당시 1000만명에 이르던 구호민을 돕기 위한 기독교의 구호활동과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기독교인 엘리트층의 급증으로 기독교 신자가 1950년 60만명에서 1960년 114만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이승만 정권에서는 엘리트층의 기독교인 비율이 전체 인구 중 기독교 신자 비율에 비해 현격하게 높았다는 점에서 ‘기독교 정권’이라 규정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한국에는 개신교, 천주교, 불교의 3대 종교 체제가 정립된다.

흔히 1950년대 경제는 평가절하의 대상이지만 미국의 31억달러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전후 복구를 1955년 완료했고, 1953∼60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4.9%에 이르렀다. 이는 다른 제3세계 국가와 비교했을 때 우수한 성적이었다. 또 이승만 정권에서 이미 3개년 경제발전 계획이 수립됐다는 점에서 1950년대는 1960년대 경제개발의 시동기였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권재현기자 coufetti@donga.com

:전상인 교수는:

전상인 교수(사진)는 1980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미국 브라운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현대사와 역사사회학, 사회변동론 등을 전공했다.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1995년부터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해 오고 있다. 미국 워싱턴주립대 교환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고개 숙인 수정주의:한국 현대사의 역사사회학’(전통과 현대)과 ‘세상과 사람 사이’(나남) 등이 있다.

▼제8강서 쏟아진 질문들▼

강연이 점점 무르익어가기 때문일까. 강연이 끝난 뒤 나오는 질문 내용이 해당 강연 자체보다는 우리 현대사 전체에 대한 고민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서울 잠실고 2학년 이순성군(17)은 “1950년대가 광복과 분단, 전쟁을 거친 뒤 대한민국이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였다는 점을 새롭게 배웠다”면서 “문화 예술적 측면에서는 어떤 시대였는가”라고 물었다. 강사인 전상인 교수는 “문학적으로는 토속과 무속에 함몰돼 있던 ‘성황당문학’을 졸업하고 현대문학에 비로소 눈을 떴으며,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가 유행했다”면서 “학문적으로는 과거 일본유학생 편향에서 벗어나 미국유학생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들이 지금의 학풍을 수립했다”고 말했다.

주부 김순이씨(43·경기 파주시 문산읍)는 “남한에서 ‘과거사 바로 세우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질문했다. 전 교수는 “북한이 남한에 비해 과거사 청산을 철저히 했지만 그 결과 지금 북한이 우리보다 잘사는 것도 아니고 민주화가 더 이뤄진 것도 아니지 않으냐”면서 “과거는 오늘의 시각에서뿐 아니라 당대의 시각에서도 볼 줄 알아야 하고, 또 그보다 더 먼 과거의 시점에서도 봐야 한다”고 답했다.

주부 임병란씨(40·서울 노원구 상계동)는 “암울했다고 믿었던 우리의 과거에서 밝은 면을 찾았는데 우리의 현실은 점차 희망이 사라져간다”면서 “현 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전 교수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소외됐던 비주류층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고민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면서 “현 정부가 그 슬로건처럼 ‘개혁과 통합’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현재까지 걸어온 대로 ‘변혁과 분리’로 갈 것인지 그 선택에 따라 역사적 평가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보호관찰 소년-인솔자 특별참석▼

20일 청소년 역사강좌 8강이 끝난 뒤 법무부 인천보호관찰소에서 보호관찰 중인 청소년들을 인솔해온 성의찬 계장(가운데)이 한광열(왼쪽), 김태휘군과 함께 강연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종승기자

20일 강연에는 특별한 수강생들이 찾아왔다. 법무부 인천보호관찰소에서 보호관찰을 받고 있는 청소년 10명이 그들. 이들은 소년원에 갈 경우 오히려 범죄의 유혹에 더 빠질 수 있다는 법원의 판단에 따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40∼160시간의 수강 명령을 이행하고 있다.

이들 중 20일 40시간의 수강 의무를 모두 이행하는 한광열군(19·고교 1년 중퇴)과 김태휘군(18·고교 1년 중퇴), 그리고 이들을 인솔한 성의찬 계장(31)이 강연이 끝난 후 즉석에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한군은 “전쟁 직후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 (기독교) 신자’가 늘었고 기복신앙이 강화됐다는 설명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미군의 보호 아래 한국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강연내용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군은 “광복 직후 80%에 이르렀던 문맹률이 의무교육 실시와 군대에서의 교육 덕분에 대폭 줄었다는 이야기가 새로웠다”면서 “당시에 비해 지금의 교육상황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성 계장은 “문제가 생기면 자기의 좁은 시각에서 바라보지만 역사를 배우면 보다 큰 시야를 갖게 되는 것 같다”면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 사고를 갖고 이를 극복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군은 “‘길거리의 한 송이 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꽃다발로 누군가에게 주어질 때 의미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서로 참고 아껴줘야겠다는 것을 배웠다”고 화답했다.

김군은 “군대 가는 것을 꺼렸는데 개인이 군에서 쌓는 경험도 국가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배웠다”며 “이번 강연을 통해 군복무에 대해 긍정적 생각을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번 주 토요 역사강좌 안내(제9강)▼

△일시=27일 오후 3시∼4시반

△장소=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

△주제 및 강사=‘박정희시대의 국제관계와 외교정책’ (홍성걸 국민대 교수·정치경제학)

▽제9강의 이해를 돕는 책

△대통령을 그리며(이동원·고려원·1993년)

△한국의 외교정책(김달중 편저·도서출판 오름·1998년)

△외교의 경험과 단상(김영주·인사동문화·2004년)

■강좌에 관한 사항은 성신여대 동아시아연구소(02-920-7089)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수강료 없음.

■지금까지의 내용은 동아닷컴(www.donga.com)'2004 청소년 역사강좌' 코너에 실려 있습니다.

권재현기자 cou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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