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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위크엔드]뉴요커중 600만명이 세입자

입력 2006-07-14 03:08업데이트 2009-10-0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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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이 성공한 덕택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렌트(Rent)’.

이 작품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꿈과 열정, 사랑으로 인한 갈등과 우정, 그리고 삶에 대한 지치지 않는 희망을 노래한다.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의 영혼을 고갈시키는 경제적 빈곤이다. 극중 베니는 오랜 친구 마크와 로저에게 임대료를 내지 않으면 내쫓겠다고 협박한다. 허름한 건물과 위험스러워 보이는 화재용 비상계단, 다양한 색깔의 낙서로 칠해진 벽 등 작품의 세트는 뉴욕의 뒷골목을 빼닮았다.

1996년 초연된 이 작품은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뮤지컬 ‘렌트’의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뉴욕에서 2만6000여 명의 세입자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거리로 쫓겨났다.

뉴욕은 600만 명의 세입자가 사는 도시다. 그 많은 세입자만큼이나 갈등도 많고, 세입자이기에 겪게 되는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전화번호 311. 뉴요커들에게는 911(긴급구호)만큼이나 중요한 번호다.

세입자 문제를 담당하는 주택보전개발부(HPD)의 서비스센터 핫라인 번호다. HPD는 뉴욕 시 전역에 걸쳐 주택이 적당한 가격에 공급되는지, 세입자에 대한 주택 서비스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등을 감시한다. 이는 삶이 불안정한 세입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필자는 지난해 겨울 부실한 난방과 온수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여러 차례 항의했지만 “같은 아파트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말이 없는데 왜 당신만 춥다고 하느냐”는 대답만 들어야 했다. 난방 시설이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한 집만 추울 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뉴욕의 낡은 아파트가 얼마나 부실한가는 애써 외면했다.

서울이었다면 세입자들이 연대 투쟁이라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이웃과의 왕래가 드문 데다 개인생활이 중시되는 분위기여서 다른 세입자들의 사정을 알기 어렵다.

1개월쯤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위층의 얼굴도 모르는 이웃이 ‘혹시 춥지 않느냐’며 311에 민원을 제기하자는 편지를 보내 왔다. 물론 이 의견에 동의했다. 311에 접수한 뒤 이 사실을 관리사무소에 알리자 긴 추위는 마침내 끝났다.

흥미로운 것은 뉴욕의 경우 난방과 온수는 외부 온도에 따른 최저 실내온도를 법으로 정해 놓았다는 점이다.

세입자의 권리를 주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든 반드시 문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기로 보내 수취인이 우편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어야 하며, 세입자가 겪은 문제점을 정확하게 날짜와 함께 기술해야 한다.

필자 친구는 새로 입주한 아파트의 낡은 카펫 때문에 알레르기로 고생했다. 몇 차례 나무 바닥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친구가 의사의 소견서가 적힌 편지를 보내고 난 뒤에야 관리사무소 측은 마루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했다.

주택 문제를 혼자 해결하기 어렵고, 도움을 받을 만한 친구가 없다고 해도 낙담하기는 이르다. 뉴욕에는 세입자와 집주인의 분쟁을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가 많다.

세입자와 집주인의 분쟁은 주로 수리비 문제에서 발생한다. 집을 쓸 만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집주인의 의무라고 세입자의 권리에 명시돼 있다. 하지만 집에 손상이 있으면 그 책임은 세입자가 져야 한다고 규정돼 있어 그 경계가 모호하다.

최근 필자는 집주인으로부터 약 35만 원의 전기 수리비를 부담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세입자의 경험과 충고가 쏟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수리비 부담 문제로 골치를 앓아온 것이다.

집주인들은 대개 세입자가 기물에 손상을 가했기 때문에 수리비를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어가 서투르거나 뉴욕의 사정을 잘 몰라 수리비를 부담하는 세입자가 많다.

몇 번 전화로 항의하다 전략을 바꿨다. 뉴요커답게 ‘쿨’하게, 목소리 높이지 않고 법적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일단 수리비가 발생한 경위와 HPD와의 통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어 아파트를 살 만한 곳으로 유지할 의무는 집 주인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법정까지 갈 용의가 있다는 편지를 등기로 보냈다.

뉴욕에서도 세입자의 삶은 분명 고달프다. 하지만 세입자를 보호하는 장치도 많다. 쉽지 않은 것은 그 권리를 찾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며 마음고생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분쟁 없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 뉴욕에서는 법정까지 가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말 그대로 ‘아는 것이 힘’인 도시가 뉴욕이다. 언뜻 화려해 보이는 뉴욕에서의 생활은 때때로 법률 지식으로 ‘무장’해야 살 만한 것이 되기도 한다.

뉴욕=박새나 통신원(패션디자이너) saena.park@gmai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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