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크엔드]‘만자이’ 코미디에 일본이 웃다

  • 입력 2006년 6월 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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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한국의 만담과 닮은 ‘만자이’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앙갈스’. 사진 제공 장혁진 씨
일본에서는 한국의 만담과 닮은 ‘만자이’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앙갈스’. 사진 제공 장혁진 씨
오후 7시. 노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양복을 벗으며 TV를 켠다.

화면에 비친 것은 뻣뻣하게 마이크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둘 중 좀 모자라 보이는 사람이 대사를 하면, 성격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사람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시 모자라 보이는 사람이 말을 하자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바로 일본식 코미디 ‘만자이(漫才)’의 한 장면이다. 요즘 일본인들은 만자이에 푹 빠져 있다. 이 내용을 좀 더 들어 보자.

A: 지난 이야기지만 정말 미국 테러 무서웠지. 무서워서 밤에도 잘 수가 없어. 쿨쿨….

B: 지금 자고 있잖아!

A: 그래서 난 이제 권총을 가지고 다니기로 했어.

B: 불법이거든.

A: 비행기 조종도 배우려고.

B: 어디서?

A: 어디에 가도 안심하고 잘 수가 없어. 쿨∼쿨

B: (네가) 지금 자고 있다니까!

만자이는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말로 세상과 인정을 풍자하는 이야기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만담과 비슷하다. 만자이가 다른 코미디와 다른 점은 표현 방식이 액션이 아니라 말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런 만자이식 코미디 프로그램이 시청률이 높은 골든타임에 방송되고 있다.

제1차 만자이 붐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요코야마 야스시와 니시야마 기요시 콤비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두 사람은 마이크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서서 한사람은 멍청한 소리를 하고, 다른 사람은 상대편의 멍청한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역할을 나눴다. 행동이나 표정 등 ‘논버벌 랭귀지(Non Verbal Language)’에도 의존하지 않고 대사만으로 관객을 웃긴다.

요즘 만자이는 30년 전에 비해 약간 변형됐지만 기본적인 형식은 그대로다. 만자이 붐에 힘입어 만자이 코미디언들의 인기와 사회적 발언력도 크게 강화됐다. 얼마 전 한 방송사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20대 여성들은 결혼 상대로 ‘돈 많고 유능한 초(超)엘리트’보다 재미있는 코미디언을 선호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본에서는 이들은 흔히 게이닌(藝人)으로 부른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최근 일본 연예계에서는 유명 여성 배우가 코미디언과의 결혼을 발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코미디언의 스캔들이 주간지 표지를 장식하는 경우도 많다.

일본에는 코미디언 매니지먼트를 전문으로 하는 기획사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요시모토 흥업’이다. 이 회사에는 현재 인기있는 코미디언 대부분이 소속돼 있다.

놀라운 것은 이 회사가 1912년에 세워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연예기획사라는 점이다. 한해 매출이 3000억 원이 넘으며 전국에 코미디 전문 소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회사의 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연예인은 상품이다. 극장은 우수한 상품을 만들어 내는 공장임과 동시에 연구소다. 우리는 언제나 재미있는 웃음을 만들 모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제2의 만자이 붐에 힘입어 일본 TV의 편성표에는 모든 요일에 반드시 코미디 프로그램이 1개 이상 들어 있다.

만자이는 일본인의 생활과 가깝게 존재한다. 가끔 고등학교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일본 영화에서 멋진 남녀 주인공이 어울리지 않게 만자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그렇다. 학생들은 각종 설문조사에서 가장 참여하고 싶은 특별활동을 만자이라고 꼽는다.

전문가들은 현재 일본 열도를 휩쓸고 있는 만자이 붐을 일본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인들은 1980, 90년대 ‘버블 붕괴’ 속에서 사회 전반적인 침체와 정신적인 공황 상태를 경험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의 출범으로 민족주의가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상황을 맞았다. 일본인들은 이라크전 참가, 애국심 강조 교육, 여성 천황의 탄생 가능성 등 정치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액션 없이 말로 진행되는 만자이의 특징을 감안하면 코미디언과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인식이 비슷하지 않으면 공감대를 얻기는 쉽지 않다.

만자이 붐에는 일본 사회의 상식과 분위기, 관심사가 적극 반영돼 있다. 일본 사회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않는다면 전혀 재미있거나 웃기지 않는다. 필자 역시 만자이를 즐겨 보지만 정치적 주제를 다룰 때면 속으로 ‘그건 오버야!’라고 말한다.

매일 아침 일본 방송에서는 코미디언들이 등장해 바쁜 어투로 시청자에게 활력을 불어 넣으려고 노력한다. 오랫동안 경제 침체 상황이 이어져 온 일본 사회에서 만자이는 고달픈 서민들에게 힘을 주는 피로해소제일지도 모르겠다. 코미디를 뛰어넘어 다양한 장르로 진출하고 있는 일본 게이닌들의 눈부신 활약을 보고 있자면 이 시끄러운 응원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이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관객이 많은 한 일본 열도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도쿄=장혁진 통신원·극단 ‘시키’ 아시아담당 총괄 매니저

escapegoa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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