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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세러피]‘여친소’를 보고

입력 2004-06-24 19:50업데이트 2009-10-0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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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사진

3월 중순이었다. 종로에 종이로 만든 은행잎이 흩뿌려져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까지 수북이 쌓인 은행잎만큼 많은 인파를 뚫고 긴 다리를 가진 한 여자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경찰복을 입은 전지현(사진)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순간 미소를 지었는데 너무 생생하고 해맑아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바로 그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는 전지현이라는 배우로 수를 놓은 온갖 장르의 조각보 같다. 그래도 ‘여친소’가 이 정도의 일관성이나마 유지하는 것은 그녀가 영화 전체를 ‘전지현’이라는 키워드로 묶어 믹스매치의 패션처럼 입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이자 섹시한 여인이며, 눈물의 여왕에 엽기녀이자 파이터인 ‘다중성’은 그 자체로 전지현의 특성이다. 그녀는 어쩌면 배우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이자 현상이다. 이름도 없이 ‘그녀’로 칭해졌던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전지현의 페르소나가 되었지만, 전지현이 인격을 가진 배우로 어필하고 싶어 했던 영화 ‘4인용 식탁’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여친소’는 영화라기보다 전지현의 근사한 이미지를 모아 만든 포토 블로그(Photo Blog) 같다. 영화가 표적으로 삼은 관객은 저마다 자신의 블로그를 만들고 45도 상방을 바라보는 ‘얼짱 각도’의 셀프샷과 친구들의 얼굴, 퍼다 나른 사진들을 전시하는 젊은 세대였을 것이다. 말보다는 이미지로 먼저 소통하는 세대, 멋진 이미지로 또 다른 자기를 구성하고 싶어 하는 세대에게 ‘여친소’는 분명히 어필하는 부분이 있다. ‘전지현 블로그’는 두 시간 동안 여성들에게는 셀프샷을 찍는 액정화면(LCD)이 되어 주고,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여자친구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 ‘꾸며진 자기’로 타인과 소통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온전한 소통을 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블로그는 주인의 취향이나 일상을 반영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안에 진실을 그대로 담지는 않는다. 이미지를 통해 얻은 관계는 대체로 피상적이다. 실제로 블로그를 통해 친구가 되거나 자주 찾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주인의 사진이 예뻐서가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가 꼭 진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의 자아가 그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함을 간파할 때 상대방은 환멸을 느낀다.

‘여친소’가 심각하게 간과한 것은 그 지점이다. 블로그는 타인과의 관계를 확장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자신을 통째로 드러내고 여러 사람과 마주친다고 해서 오프라인에서보다 더 쉽게 타인과 관계다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답은 “아니요”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영화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멋지게 연출된 이미지는 찰나의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관계가 보다 온전해지려면 이미지에 합당한 정서의 진정성을 그 안에서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여친소’는 그것 없어도 소통할 수 있다는,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을 했던 듯하다. 종로 바닥의 종이 은행잎처럼 공허한 ‘여친소’를 보며 생각한다. 언제쯤이면 전지현이라는 환한 웃음을 가진 배우는 블로그 밖으로 뛰어나와 생명을 가진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경상대 병원 hjyoomd@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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