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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세러피]‘아라한-장풍대작전’을 보고…

입력 2004-05-13 17:09업데이트 2009-10-0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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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사진

나는 길 가다 “기에 관심 있으십니까?”하는 소리를 유난히 자주 듣는다. 대체로 “인상이 참 맑으시네요” 따위의 기가 막힌 소리들을 하지만, 사실은 기가 (또는 귀가) 상당히 약해 보이나 보다 생각한다. 그들을 따라가 본 적은 없지만, 만약에 내가 관심이 있다고 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다. 혹시 상영중인 영화 ‘아라한-장풍 대작전’(이하 ‘아라한’)에서처럼 도인들이 운영하는 도장으로 데려가 “너는 기가 맑아서 ‘아라치’가 될 재목이니 지금부터 수련을 받으라”고 하는 건 아닐까?

혹시 ‘아라한’에서 좌충우돌하던 열혈경찰 류상환(류승범)도 그렇게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에 이끌려 도장에 따라 가게 된 것이었다면 과연 ‘마루치’가 될 수 있었을까? 영화 속에서처럼 진짜 도인들이 아니라 퇴락한 무술인과 역술인들이 감언이설로 구슬려 수련을 받게 했다면?

그래도 사실 결과가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다. 보통 사람을 ‘마루치’가 되게 하는 것은 그런 가능성이 잠재해 있음을 누군가 인정해 주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실제 크게 될 재목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당신은 기가 허해 보이고 형편없이 충동적이며 세상 물정을 모르니 수련을 받으라”고 했다면 상환은 특유의 걸쭉한 입담으로 욕만 퍼부어주고 떠났을 것이다. 대신에 “너는 센 녀석이니 너의 기운을 느껴라. 단, 자신을 통제할 열쇠를 지녀라”는 말은 천방지축의 상환이 내공 출중한 흑운(정두홍)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만들었다. 내게도 만약 길 가다 만난 낯선 이가 “당신은 왠지 흐리멍덩하고 잡념이 많아 보이는군요.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면, 도가 궁금해지기는커녕 대로변에서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사람을 변화하게 만드는 것은 약점과 부족한 점을 꼬집고 고치도록 종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미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기술이자 내공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라한’의 도인들은 사람 다루는 도를 깨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상대방에게 스스로를 거울처럼 비추어 보고 그 모습대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도 마찬가지고, 배우자든 연인이든 업무상의 파트너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내게서 ‘아라치’를 발견하여 그것을 일깨워주면 나는 ‘아라치’가 되는 것이고, ‘골룸’을 일깨워주면 ‘골룸’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마루치 아라치’의 싹은 존재하며 눈 밝은 스승이나 부모는 그것을 조금 더 쉽게 찾아낸다.

어떻게 보면 류승완, 류승범 형제 역시 그렇게 성장한 ‘마루치 아라치’들이다. 4년 전 종로의 한 극장에서 류승완 감독의 첫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보면서 그들의 기에 눌려 숨이 멈출 것 같았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현재의 ‘아라한’보다 그때의 전율은 몇십 배나 더 컸다. 그때 만약 그 영화에 숨어 있는 미완의 기운이 발견되지 않은 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게다가 ‘양아치’ 인상의 아마추어 배우가 주연을 맡은) 초저예산 영화로 그저 잊혀졌다면 지금의 ‘류 브러더스’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숨어 있는 자유롭고 거침없는 창작의 의지와 맞닥뜨리는 때가 바로 ‘도 혹은 기’와의 가슴 뛰는 조우의 순간일 것이라고 ‘아라한’을 보며 생각한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경상대 병원 hjyoomd@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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