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세러피]‘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 입력 2004년 4월 15일 16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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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구에 서서, 얼핏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어/군중은 스쳐가고, 여인들, 어린이들, 병사들/그들은 하느님과의 접경지대에서 빙빙 돈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젊은 시절에 쓴 시 ‘키레네 사람 시몬’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상영 중인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짧지만 인상 깊은 부분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는 장면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오다가 강요에 못 이겨 십자가를 져 준 것으로 묘사됐고, 신약성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시종 선악의 경계가 너무 분명하고 너무 잔혹해서 되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화면 가운데 망설임과 주저함, 당혹감과 분노가 섞인 그의 눈빛은 매우 인상적이고 또 인간적이다.

나는 우리 대부분이 살면서 갖게 되길 바라는 선의(善意)란 키레네 사람 시몬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예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기억해 달라”고 했던 예수 왼편의 죄수 정도일 것이다.

키레네 사람 시몬의 에피소드는 평범한 사람이 졸지에 신의 영역에 속한 사건을 만나고, 문득 그 사건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이다. 그는 소리 높여 도그마를 외치거나 신에게 경배하지 않지만, 잠시의 저항과 망설임 끝에 몸으로 느낀 확신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해야 옳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수난 전체를 조망할 힘은 없었지만, 지금 겪고 있는 일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순간이 되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삶의 방향을 바꾸고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딱 그만큼의 예민함과 용기가 필요한 것 아니던가.

심리학자 카를 융은 종교를 “신적인 것(누미노즘)에 대한 체험을 통하여 일어나는 의식의 독특한 변화”라고 정의했다. 사실 같은 종교를 가졌다고 같은 신을 믿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과 같은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영화의 감독인 멜 깁슨이 가진 종교적 믿음이나 체험이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굳이 어떤 종교를 갖지 않더라도 어떤 일이나 대상에 의미를 두고 오랜 시간 열정을 쏟는 것은 곧 종교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요체는,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있는 것이다.

어떤 종교, 신앙을 가졌든 간에, 중요한 것은 진리 혹은 진실이 내 눈 앞에 왔을 때 ‘얼핏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통용되는 가치 체계가 사실은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한번쯤 의심하는 것이고, 지독한 고통의 기간을 감내하고 나서 인간이 구원 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이다.

“예수가 받는 채찍질과 십자가형의 가해자는 바로 너”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이 영화의 그리스도 잔혹사는 때로 너무 버겁다. 하지만 그 화면 안에 숨어 있는 키레네 사람 시몬은 어쩌면 예수의 부활보다 더 현실적인 믿음을 준다. 어떨 때 나는 빌라도 앞의 군중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또 시몬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병원 hjyoomd@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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