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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세러피]'사랑도…' 낯선 세상의 패러다임과 通하기

입력 2004-03-04 17:22업데이트 2009-10-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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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미국의 한 대학병원에 가서 영어로 된 진단 도구의 사용법을 익혀야 했던 적이 있다. 대학 정신과 병원에 온 어린이들의 부모들과 영어로 두 시간가량 면담을 한 뒤 그 내용을 보고서로 만들고 미국인 트레이너에게 면담 과정과 결과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를 평가 받는 것이었다.

영어가 미숙한 나는 연수 기간 내내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한국어로 진행한다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 낯선 언어체계에 갇혀 버린 내겐 극도의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상영 중인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를 보며 밥(빌 머리)이 일본에서 겪는 낯설고 어색한 기분이 자꾸 눈에 들어왔던 건 최근의 그런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모든 것에 낯설고 불편해 하던 밥이 샬롯(스칼렛 조핸슨)을 알아보고 가까워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모국어를 공유하며 동양인들 틈에 낀 서양인이라는 점에서 모습도 비슷하고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공허함을 느낀다는 점까지 닮았으니까.

두 사람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밥은 모든 새로운 것을 거북해 하고, 권태로워하며 혼자서는 호텔 밖을 탐색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틀에 갇혀 있다. 어쩌면 중년의 위기나 우울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면 샬롯은 일본에서도 친구들을 만들고 조심스럽게 일본의 문화를 기웃거린다. 교토의 신사에서 결혼식을 바라보며 자기 경험을 반추해 보고 종이에 소원을 적어 나무에 매달아 보기도 한다.

그래서 샬롯과 밥의 만남은 횡적인 연인 관계라기보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세대간의 조우처럼 보인다. 그러니 사실 로맨스가 성립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언뜻 이 영화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낯선 미국 땅에 이탈리아 이민으로 던져졌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세대에 바치는 오마주(Homage·경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에 둘이 거리에서 만나 둘만 알아듣는 소리로 속삭이는 장면은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앙코르와트 사원의 구멍에 무슨 이야기인가를 흘려 넣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화양연화’의 속삭임이 차우와 리첸의 관계가 차우의 마음속에 내재화되는 것을 의미한 반면, 이 영화에서의 속삭임은 어떤 종류의 소통이 겨우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밥은 샬롯을 통해 그제야 낯선 다른 세상 혹은 다른 세대의 패러다임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밥의 기분에 공감하면서도, 자꾸 이의를 제기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밥은 (혹은 이 영화는) 왜 통역의 영어를 답답해하고 일본인들의 부정확한 영어 발음을 비웃으면서 (L과 R를 구분하지 못하는 보편적인 현상을 희화화하다니!), 한마디의 일본어라도 익혀 볼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밥에게는 낮게 매달린 샤워기를 짜증스러워할 자유가 있는데, 처음 우리가 미국의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 발이 땅에 닿지 않았던 경험은 단지 짧은 다리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기억되어야 하는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의미를 잃지 않고 ‘통역’될 수 있으려면 타인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못지않게 내가 가진 차이를 존중 받는 것도 중요하다. 이 영화는 본의 아니게 그 지점에서 살짝 길을 잃은 것(lost) 같아 좀 씁쓸하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병원 hjyoomd@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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