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서 만난 삼국유사]오대산 상원사 가는길

  • 입력 2003년 12월 25일 17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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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를 찾는 날 첫눈이 내렸다. 절 마당 한쪽 종각에서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기품 넘친다는 범종이 소담스레 눈을 맞고 있다.

들여다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듯, 벽에는 성긴 창살의 문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사이를 비집어 가며 던져 놓은 동전이 범종 가까이에 수북이 쌓여 있다. 그렇게 하며 빌었던 크고 작은 소망은 다 이루어졌을까?

상원사와 함께 월정사(月精寺)를 품에 안고 있는 오대산은 중국에서 그 이름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출가(出家)의 보살이라 일컫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은 그가 죽은 다음 동북방의 나라에 봉우리가 다섯 개인 산에서 머물 것이라 예언했다. 중국인들은 이 예언에 맞는 산을 산시(山西)성에서 찾았고, 그곳을 오대산이라 불렀다.

상원사 종에 그려진 비천상이다. 구름을 타고 앉아 하프처럼 생긴 '공후'와 파이프처럼 생긴 '생항'을 연주하는 사람의 모습이어서 '주악천인상'이라고 부른다.

신라 사람들이 강원도 오대산을 그렇게 이름 붙인 것도 일단 중국에서 기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문수보살이 계시는 산으로 동서남북 사방과 가운데를 포함한 다섯 봉우리를 상정한 일도 마찬가지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상원사를 진여원(眞如院)이라 부르고 있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의 두 아들 효명(孝明)과 보천(寶川)이 여기에 와서, 세속의 모든 욕심을 잊고 평생을 살아가리라 다짐했는데, 진여원을 중심으로 다섯 군데 봉우리에 있는 암자를 찾아가며 차를 끓여 바치고 정성을 다하였다. 그 자리들은 지금 그대로 남아 있다.

동쪽은 관음암이라 하고 남쪽은 지장암이라 한다. 월정사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서쪽은 염불암이요 북쪽은 미륵암이다. 가운데는 적멸보궁이라고도 부르는 사자암이다. 오대산의 제일봉으로 해발 1563m인 비로봉 바로 아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서쪽의 염불암이 가장 눈길을 끈다. 삼국유사에서는 미타방 또는 수정사(水精寺)라 하였는데, 요즈음 이곳을 수정암이라 하기도 한다.

사진작가 이지누는 “간섭하지 않고 한껏 외롭게 내버려두는 염불암”이라 말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산에는 화전민이 살았는데, 염불암은 마치 그들이 살던 너와집 비슷한 모양새다. 이 암자의 마루에 걸터앉아 앞산을 바라보노라면, 하염없는 외로움도 그대로 흘러가는 듯싶다.

염불암 바로 아래 우통수라 불리는 샘이 있다. 예부터 한강의 발원지라 생각했던 곳이고, 효명과 보천이 여기서 물을 떠다가 차를 끓였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왕실에서는 그들을 그렇게 버려둘 수 없었다. 어느 날 신하들이 모든 차비를 하고 왕자들을 모시러 오대산을 찾아온다. 이제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이 깊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신하들은 산 아래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다섯 빛깔의 구름이 7일 동안 드리워져 덮였다. 신하들은 구름을 보고 찾아가 두 왕자를 만난다.

보천은 울면서 사양했고 효명이 돌아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효소왕(재위 692∼702)이다.

그로부터 보천은 오대산에서 50여 년을 더 살았다. 그가 얼마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삼국유사에서는 특이한 예화를 들어 일러준다. 여러 신들이 보천의 설법을 들으러 모여들었고, 가지고 있는 지팡이가 하루에 세 번씩 소리를 내며 방을 둘러싸고 돌아 이에 맞추어 때를 삼았으며, 어떤 때는 문수보살이 물을 길어 이마에 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오대산에는 특히 전나무가 많다. 월정사로 들어가는 전나무 숲길의 위용이야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사실이지만, 산의 이곳저곳에서 자생하는 전나무가 만들어 내는 풍경은 이루 형용하기 어렵다.

비로봉을 오르는 좁은 등산로에서 잠시 멈추고 전나무 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올겨울에도 저 나뭇가지에 눈이 많이 내려 쌓일 것이다.

염불암 우통수 물을 받아 다시 한번 차를 끓이고, 깊은 밤을 홀로 새우며, 눈이 내리는 소리와 생애가 흘러가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 우통수에 출발한 물이 골짝 골짝을 지나 한강에 이르는 먼 꿈을 꿀지도 모르겠다.

그때 보천태자가 나타나 우리들 이마에 시원한 샘물을 길어 부어주지나 않을까.-끝-

고운기 동국대 연구교수 poetko@hanmail.net

▼주변에 가볼만한 곳▼

영동고속도로 진부 톨게이트에서 나오면 6번국도를 만나는데, 월정사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곧 국립공원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곳곳에 펜션이 많이 들어서서 숙박하기에 좋다.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길은 아직 비포장 도로. 이런 시골길은 이제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렵다.

상원사까지 버스가 다니고 있는데, 험한 고갯길은 없기 때문에 눈이 온 날에도 자동차로 갈 만 하다. 그 중간에 오대산 사고(史庫)를 볼 수 있다. 물, 불, 바람의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다고 하여 사고를 설치한 것은 1606년(선조 39년). 그러나 이런 풍수지리도 6·25전쟁의 불길은 어찌하지 못하였다. 지금 건물은 1960년대 후반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서 말한 6번국도에서 월정사로 가는 길을 들어서지 않고 곧장 가면 진고개를 넘어 주문진까지 이른다. 고개가 나타나기 바로 전에 오른쪽으로 꺾으면 한국자생식물원으로 갈 수 있다. 산 하나가 야생식물로 가득 찬 이곳은 지금은 겨울이라 한가하지만, 봄에서 여름까지 온갖 종류의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진고개를 넘어서면 오른쪽으로 소금강이다. 오대산의 동쪽 면을 이루는 소금강은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불릴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소금강 계곡의 맑은 물은 어느 계곡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다. 청심대, 만물상, 구룡폭포 같은 볼거리도 많다.

:촬영노트: 눈 오는 날 염불암 가는 길은 무척 즐겁다. 조릿대가 늘어선 오솔길을 지나 아름드리 전나무, 우통수 샘물까지 이르는 험하지 않은 산길에 있는 모든 것이 사진 찍기 좋은 소재다.

우통수에서 염불암까지 이어진 길에는 법당에 올릴 샘물을 뜨러 다녀간 스님의 발자국이 새로 내린 눈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이 또한 놓치기 아까운 사진이다.

이때 염불암을 보겠다고 성큼 나섰다가는 눈길의 고요한 분위기를 단박에 깨는 등산화 자국을 찍고 만다. 조심조심 사진을 찍고서야 염불암으로 향한다.

염불암은 스님 혼자 기거하는 조그만 너와집이다. 그저 산골 오두막 같은 집이지만 앞뜰에서 바라보는 풍경만큼은 무척이나 장엄한데, 바람과 눈만 가득한 이곳에서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우통수 물 한 바가지에 마음 비우고 돌아오는 것도 좋다.양 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tophoto@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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