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서 만난 삼국유사] ‘부자의 情’ 묻어나는 분황사

  • 입력 2003년 10월 9일 16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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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터 여기저기를 한시간쯤 쉬엄쉬엄 거닐어 보자. 요즘 같은 가을 오후가 제격이다. 해가 지고 별이 뜰 때까지도 쉬 떠나지 못하는 은밀한 유혹에 빠질 것이다.

황룡사 터 여기저기를 한시간쯤 쉬엄쉬엄 거닐어 보자. 요즘 같은 가을 오후가 제격이다. 해가 지고 별이 뜰 때까지도 쉬 떠나지 못하는 은밀한 유혹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분황사에서 분황사의 사람을 만난다. 먼저 만난 사람이 희명이라는 여자다.

신라 경덕왕 때 살았다고 했을 뿐, 신분과 처지를 알려 주지 않는다. ‘빛을 바란다’는 뜻을 가진 이름조차도 삼국유사에 이 이야기를 싣자고 지은 가명이라 보는 이들도 있다.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다. 멀쩡하던 아이는 갑자기 시력을 잃고 만이다.

이를 전하는 기록은 뜻밖에 간단하다. ‘어미는 아이를 안고 분황사 왼쪽 전각의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벽화 앞으로 갔다. 노래를 지어 아이에게 기도하게 하였더니 드디어 눈이 떠졌다’는 것이다.

천수대비는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지고, 두루 세상을 살펴보면서 어려운 곳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는 관음보살이다.

어미는 관음보살상이 가진 천 개의 눈 가운데 단 하나가 탐날 뿐이다. 딸에게 부르게 한 노래 ‘천수대비가’ 가운데, ‘일천 개 손 일천 개 눈/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달라고 애원하는 대목이 나온다. 노래는 이어진다. ‘둘 없는 내라/한 개사 적이 헐어 주시려는가.’

황룡사터 옆에서 발견된 탑의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

벽화에 감히 손댈 수는 없지만 어미의 마음은 이미 제 손으로 관음보살의 눈 하나를 떼 오기 직전이다. ‘자비라면 어디에 쓰려고 나를 외면하시냐’는 마지막 부분은 절규에 가깝다.

어미와 딸이 손잡고 피눈물 흘린 끝에 딸은 빛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빛만 얻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음의 눈까지 얻어 돌아가는 모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천수천안대비상이 그려져 있었다는 ‘분황사 왼쪽 전각’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 자리쯤일까, 절의 스님들이 심어 놓은 야생화가 철마다 꽃을 피운다.

분황사에서 한 사람만 더 만나자면 원효의 아들 설총이다. 그는 무슨 일로 분황사를 찾는 것일까?

승려의 신분인 원효는 과부가 된 공주와 동침해 아들을 낳았다. 그 다음부터 원효의 행적은 귀천에 가림 없이 모든 이에게로 향한다. 그리하여 독 짓는 옹기장이에다 심지어 원숭이 무리들까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했다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극찬했다.

원효는 일세를 풍미하였으나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살다 갔다.

그런 생애를 누구보다 잘 안 사람이 아들 설총이었다. 설총은 아버지가 죽자 유해를 잘게 부숴 얼굴 모양 그대로 만들고 바로 이곳 분황사에 모신다.

그런데 웬일인가. 아들이 예불을 드리러 오자 원효의 얼굴상이 홀연 돌아보았다 하지 않는가. ‘지금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라고 일연은 적었다.

아비는 아들의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천하를 호령했던 원효였지만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들 앞에서는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설총에게는 파계승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내내 따라다녔을 것이다. 집을 떠난 아비의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아비는 죽어서야 비로소 아들이 만들어 준 얼굴로 아들의 얼굴을 정답게 바라본 것인지 모른다.

지금 분황사에는 원효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물론 설총이 만들었다는 얼굴상은 언제 없어졌는지 소식을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사무친 부자간의 정이야 사라졌겠는가.

글=고운기 동국대연구교수 poetko@hanmail.net

사진=양 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tophoto@korea,com

▼주변에 가볼만한 곳▼

경주는 너무 잘 알려진 곳이기에 새삼 소개하기가 번거롭다. 그러나 보통 경주여행이라 하면 모두들 잘 닦여진 곳만 가보기 때문에 역사의 향기를 더듬을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의 발길이 잘 머물지 않는 곳으로 분황사와 황룡사 터가 우선 꼽히지만 기왕에 이런 코스를 택한다면 불국사 가는 길 쪽으로 조금 옮겨 가 사천왕사 터와 망덕사 터를 한눈에 놓고 보는 곳에서 한 번 더 소요할 수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사천왕사를 지었으나, 이 때문에 당나라의 ‘사찰’을 받게 되자 부랴부랴 거짓으로 다른 절을 하나 더 짓게 되는데, 이렇게 사신들을 속이기 위해 지었다는 절이 망덕사이다.

눈에 보이는 것 없이 터만 남은 곳이라 실망하겠지만, 거기에 맛을 들인 사람은 오히려 이런 데만 일부러 찾기도 한다. 특히 망덕사는 ‘제망매가’의 시인 월명(月明)이 살았던 곳으로도 이름이 나 있다. 월명이 밤길에 피리를 불고 가노라면 달이 따라오다가 서기도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망덕사에서 사천왕사로 가는 길이 바로 그 길이라 한다.

요즘에는 신라 문화를 선양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월명제’라는 조촐한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도 눈에 좀 보이는 유물을 보고 싶다면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경주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돌려도 좋겠다. 1960년대에 발굴된 분황사 불상들이 경주 박물관 야외에 옮겨져 전시되어 있다. 햇볕 좋은 가을날에는 그저 걸어서 산보하듯이 다닐 만한 거리이다. 도중에 황룡사 터의 한 쪽에서 진행 중인 신라시대 경주 시가지 발굴 현장도 둘러볼 만한 곳이다. 자녀들과 함께라면 이만큼 좋은 학습장도 없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는 안압지와 첨성대도 들릴 수 있다. 본디 세자궁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안압지는 꽤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고, 몇 가지 자료도 갖춰져 괜찮은 학습장이 된다. 첨성대에서 바로 앞으로 이어지는 반월성 안까지 산책하는 길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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