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LOOK]2003년 예술계 화두는 '변화'

  • 입력 2003년 1월 8일 18시 00분


코멘트
이제 우리 사회는 건축가의 생각이 담겨 있는 공간과 건축을 요구하고 있다. 수 년 동안 계획되어 왔던 경기 파주 출판도시나 헤이리 아트밸리가 새해에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반가운 것은 그 때문이다. 헤이리 아트밸리 조감도./동아일보 자료사진
이제 우리 사회는 건축가의 생각이 담겨 있는 공간과 건축을 요구하고 있다. 수 년 동안 계획되어 왔던 경기 파주 출판도시나 헤이리 아트밸리가 새해에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반가운 것은 그 때문이다. 헤이리 아트밸리 조감도./동아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말 우리는 2003년 한국 사회의 최대 명제가 ‘변화’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계미년 첫 아웃룩은 이 시대적 요청 앞에서 우리의 예술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또는 어떤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지를 전망하고 진단하는 글들을 모아 봅니다.

외과(外科)적인 제도변화에 대해서는 연극분야를 통해, 평론과 실천 사이의 내과적인 관계 변화에 대해서는 음악분야를 통해, 그리고 세대간의 가정의학적 역학 변화에 대해서는 건축분야를 통해서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분야는 각각 다르지만 글의 안팎을 곰곰이 살펴보면 각각의 변화는 결국 모두의 변화로 확장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김윤철 연극원 교수》

▼건축, 공공예술로 거듭나야…독특함보다 도시와의 조화-친환경우선 고려 ▼

건축은 태생적으로 사회적이며 공공적인 문화활동이다. 지어진 건물은 비록 개인소유라 할지라도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이용된다. 설계 의도에 따라 도시나 자연환경을 파괴할 수도 있고 개선할 수도 있다.

또한 건축가는 대학 졸업 후 10여년의 다양한 훈련을 통해 양성되며 인문 사회적 지식과 철학을 건축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요 문화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자본의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건설업자 취급을 받아왔고 건축가 자신도 그 역할에 만족해왔다.

그러나 상황은 변하고 있다.

값싸고 넓은 집만 요구하던 건축주들 스스로가 건축가의 생각이 담겨있는 예술적인 공간과 건축을 요구하고 있고 그런 능력을 갖춘 건축가들을 선택하려 한다. 수년 동안 계획되어 왔던 파주 출판도시나 헤이리 아트밸리가 새해에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어서 반갑다. 개별건물의 독특함보다 도시의 전체적 조화와 친환경적 건축을 우선시하는 이 두 프로젝트에는 국내외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건축의 공공성과 사회성을 구현하는 것이 이 두 도시의 목표이기도 하다.

황폐한 건축과 도시환경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시민단체들도 활동을 개시했다. 북촌 한옥마을 보전을 위해 ‘한옥을 사랑하는 모임’이, 해인사를 비롯한 건축환경조성을 지원하는 ‘아름지기’가, 도시공간의 공공성을 추구하는 ‘문화연대’가 지자체에 대해, 그리고 건축전문가에 대해 시민적 권리를 더 강하게 요구하고 감시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화답하듯 건축계도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려 하고 있다.

30, 40대 건축가들이 주축이 되어 올 초 창립을 앞두고 있는 ‘새건축사협회’는 전문직 윤리를 확립하고 건축의 공공적 책임을 다할 것을 선언할 것이다. 국내 건축계를 리드해 왔던 중견건축가들은 여전히 활발한 공익활동과 작품창작을 펼친다. 해인사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정기용과 작년 한강 선유도공원을 설계하여 국제적 명성을 얻은 조성룡이 대표적인 예다. 건축계에서는 세대교체가 아닌 ‘세대확대’라는 바람직한 변화가 예견된다.

새해에도 건축의 공공적 책임을 요구하는 큰 전쟁터가 기다리고 있다. 청계천 복원과 강북 뉴타운 개발을 둘러 싼 논란, 과감한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해제와 대규모 개발, 행정수도 이전 찬반운동 등. 모든 싸움은 개별 자본의 이익 대 사회적 공익의 대결이 될 것이며 이 치열한 전투가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질 전망이다.

부동산 투기, 개발이익, 정경유착의 부조리, 각종 심사와 심의의 불공정, 상업주의와 기술주의가 만연하는 건축시장…. 그리고 여전히 기존 건축단체들과 대부분의 건축가는 권력과 자본의 요구에만 길들여져 있고 새로운 움직임을 분파주의로 몰면서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문화로서의 건축을 요구하는 시장도 형성되고 이를 수행할 전문인력도 존재하며 외부의 지원세력도 늘어날 것이다. 새해는 건축이 공공예술로 거듭나는 원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봉렬 (미술원 교수)

지금 연극의 위기는 예술혼의 치열성을 잃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지난해 말 한 시상식장에서 연출가 채윤일은 “연극배우들이 영화촬영을 기다리느라 연극 ‘진땀 흘리기’ 연습 기간 중 모두 모여 연습한 것이 세 번뿐이었다”고 토로했다./사진제공 채윤일씨

▼겉핥기 지원’ 연극혼 꺾는다…1년단위 대상선정…일정 촉박해 공연부실 ▼

변화를 소리 높여 외쳐 온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니까 변화는 우리 국민이 시대의 명제로 선택한 최고의 가치였던 셈이다. 무능한 정치뿐 아니라 이유 없이 안주하려드는 예술도 변해야 한다. 우리의 연극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연극은 항상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늘 살아 남았다’고 낙관하거나 자위할 일이 아니다. 지금의 위기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전과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술혼의 치열성을 상실한 데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한 시상식장에서 연출가 채윤일은 수상소감을 대신해서 연극계 실정을 비통하게 토로했다. 연극배우들이 영화 촬영을 대기하느라고 연극 ‘진땀 흘리기’ 연습기간 중 전체가 모여 연습한 것이 세 번뿐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연극인들의 월평균 수입이 45만6000원에 지나지 않음을 상기하면 연극배우들이 목돈을 만질 수 있는 영화에 매달리는 것을 나무랄 수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연극한다는 것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난을 각오한 사람들의 의식적 선택임도 함께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예술혼을 파괴하는 이 바이러스가 배우들뿐 아니라 연극계 전체를 무차별하게 감염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갈수록 좋은 공연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은 그 탓이다.

국가가 부도위기에 빠졌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연극에 대한 공공지원은 오히려 늘었다. 지방자치단체와 문화관광부가 매칭 펀드(matching fund) 방식으로 기존 문예 진흥기금과 별도로 무대 공연예술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한 것이다. 99년 20억원으로 시작해서 지난해에는 120억원에 이르렀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모든 공연이 어떤 형태든 지원을 받는다. 지원이 없으면 제작할 엄두를 내지 않는다.

해마다 지원금이 지급되기 전인 1, 2월에 연극공연이 가장 뜸한 것이 그 증거다. 지원을 늘렸는데도 연극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후퇴한다는 사실은 지원제도에 문제가 있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은 1년 단위의 지원을 강제하는 회계법과 소액다건주의라는 반예술적 포퓰리즘의 지원정책에 있다. 전년도 12월에 가서야 지원 대상을 선정하는 문예진흥기금이나 당해연도 2월말에 가서 확정짓는 무대공연 지원사업은 모두 그 해 말까지 공연하는 것을 의무화한다. 요컨대 일정이 촉박하다. 촉박한 일정은 부실한 공연을 낳고, 연극예술가들을 지원금 타먹는 기술자로 전락시키기 쉽다.

31년 전 문화예술진흥법이 만들어진 뒤 적지 않은 돈이 연극계에 투입됐지만 과연 연극이 얼마나 진흥됐는지 의심스럽다. 유럽처럼 반영구적으로 지원하여 연극인들이 예술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우선 능력 있는 공연단체에 적어도 몇 년간 집중 지원하는 다년지원제도를 중간단계로 도입하는 것은 어떤가. 연극인 스스로 예술혼의 치열성을 지켜야 하지만 사회가 외부적 제도를 바꿈으로써 그것을 도와주면 공공재로서의 연극이 좀더 효율적으로 진흥되지 않겠는가.

김윤철 (연극원 교수·연극평론가)

▼평론가 키워야 음악도 큰다…연주계 나서서 의욕적 비평환경 조성을▼

우리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낙후된 분야는 평론 부분일 것이다. 평론가 무용론은 평론가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때부터 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연주가나 작곡가들은 평론가의 자질과 능력을 의심해 왔고 그들의 의심이 괜한 심술이 아니라는 증거도 역사적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초연되는 음악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는 후대 사람들을 의아하게 할 정도로 빗나가는 경우가 흔했다. 정말 그렇다면 평론가는 없어도 되는가?

평론가 없는 세상은 스포츠에서 마치 야구 해설가 없는 프로 야구와 같다. 볼 하나, 스트라이크 하나, 희생 플라이 하나의 의미가 전체 경기 흐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고 본다고 생각해 보라. 해설가의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야구가 보이고, 더 맛이 나는 경기로 바뀐다. 바로 이런 역할을 평론가가 할 수 있다. ‘빠데루 아저씨’의 해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레슬링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를 보면 그 역할의 중요성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음악 평론가라는 타이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 범위는 주로 월간지에 국한된다. 신작 작품에 대한 평은 월간지로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연주회 평은 그렇지 않다.

청중이 연주회 기억을 생생하게 지니고 있는 기간을 넘겨 평이 나오면 유효기간이 지난 식품과도 같다. 그런 뜻에서 보면 일간지야말로 그 효과가 가장 뛰어난 평론 매체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일간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직업 평론가가 없다. 이 직업 평론가 없는 음악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언론 매체를 탓할 일이 아니다. 우리 음악계 모두의 책임이다. 연주계나 평론계나 모두 아마추어리즘에 안주해온 탓이다. 직업 평론가가 없는 음악계는 곧 직업 연주가가 없는 음악계와 다를 바 없다.

과연 우리 연주계 역량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이제 우리 연주계도 직업 평론가를 가질 정도의 역량이 되었다.

먼저 성숙한 연주계가 나서서 평론가를 육성하자. 혹평을 피할 길은 없다. 서양의 제1세대 평론가 중 한 명이었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은 나쁜 작품에 대해 혹평하지 않는 것은 좋은 작품에 대해 호평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성숙된 자세로 평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면 궁극적으로 우리 음악계가 행복해진다. 2003년 새해를 맞아 능력 있는 신예 평론가들이 의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과 공간이 보장되기를 소망해 본다.

허영한 (음악원 교수·음악평론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