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의 고향을 찾아서 2]중화문화의 기원 고대 聖君들

  • 입력 2002년 10월 13일 17시 20분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과 리펑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의 비문 글씨가 황제릉의 안뜰에 나란히 서 있다. 김형찬기자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과 리펑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의 비문 글씨가 황제릉의 안뜰에 나란히 서 있다. 김형찬기자
“염황자손(炎黃子孫)”

중국 산시(陝西)성 황링(黃陵)현에 있는 황제릉(黃帝陵)에 들어서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천명하는 전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글씨가 입구에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염제와 황제, 그 중에서도 황제의 후예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고대의 제왕들은 그밖에도 여럿 있다. ‘주역’의 괘를 처음 그렸다는 복희(伏羲), 고대 중국의 유토피아로 여겨지는 ‘요순시대’의 주인공 요왕(堯王)와 순왕(舜王), 범람하는 중원의 물길을 잡았다는 우왕(禹王)…. 시대순으로 보면 복희가 가장 앞서지만 중국인들은 그보다 약 1000년 뒤지는 염제와 황제를 최초의 조상으로 여긴다. 또한 가장 이상적인 성군(聖君)이었다는 요왕과 순왕보다 실질적으로 중원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만들어 줬다는 우(禹)를 더 떠받드는 듯하다. 이는 중국철학사에서 일반적으로 복희나 요왕, 순왕을 이상적인 성군(聖君)의 모델로 높이 평가해 왔던 것과는 다르다. 실용적인 삶을 중시하는 이 시대 중국인의 사고방식이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약 5000년 전에 살았다는 염제와 황제는 각각 강씨(姜氏)와 희씨(姬氏) 부족의 족장으로 한때 서로 적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부족과 맞서 싸우기 위해 연맹을 맺은 뒤에는 함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며 중국 민족과 문화의 기원이 됐다고 전해진다. 신농씨(神農氏)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진 염제는 농사짓는 법을 개발해 가르쳤고, 황제는 집을 짓고 가축을 기르도록 했을 뿐 아니라 결승문자와 간지(干支)를 만들어 문화생활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황제릉의 사당에는 ‘인문초조(人文初祖·인류문화의 시조)’라는 현판이 당당하게 걸려 있다.

중국 쩌지앙성 샤오싱시에 있는 ‘대우릉’.김형찬기자

B.C. 23세기 경에 살았던 우왕은 능력과 인품을 갖춘 자를 발탁해 왕위를 넘겨주던 요왕과 순왕의 선양(禪讓) 전통을 파기하고 자식에게 왕위를 잇게 하는 왕위 세습제를 시행했다는 점에서 정치 철학이나 국가 제도사의 면에서는 요왕이나 순왕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돼 왔다.

그러나 우왕은 끊임없이 물길을 바꾸며 범람하던 황하의 치수(治水)에 성공해 중원의 안정적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그 덕에 ‘한족(漢族)’이 번성하게 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중국인들은 쩌지앙(浙江)성 샤오싱(紹興)시에 ‘대우릉(大禹陵)’ 이라는 거대한 능을 꾸며놓고 그 안에 전형적인 한족(漢族)의 이목구비를 갖춘 건장한 청년 우왕상(禹王像)을 세워 놓았다.

그런데 복희, 염제, 황제, 요, 순, 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인물이고 이중 복희 염제 황제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전설에 가깝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은 이 제왕들의 능을 화려하게 만들어 놓고 참배한다. 속세의 시간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던 인도인들과 달리 중국인들은 신화나 전설마저도 구체적인 역사 속에 위치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중국 산시성 황링현 황제릉에 입구에 있는 덩샤오핑 전 중국 최고지도자의 글씨 비문 ‘염황자손’. 김형찬기자

중국에는 전지전능한 신이나 내세의 구원 대신 평범한 인간이 노력해서 신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이 되고 그런 성인을 중심으로 건설했다는 ‘인간의 역사’만이 존재한다. 신성한 성인과 신비로운 신선의 ‘역사’, 그리고 인간 주변에 엑스트라로 맴도는 귀신(鬼神)의 ‘이야기’는 존재할지언정 관심 밖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전(神殿) 대신 고대 제왕들의 능을 찾아와 자신이 바로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며 정통성을 확인하는 것은 당대에 성인이 되고 제왕이 되려는 자의 당연한 의무다. 이 전설적인 고대 제왕들의 능에는 각 시대에 군주와 권력자들이 세웠던 비석들이 숲(碑林·비림)을 이루고 있다. 이런 세속의 욕망은 봉건 제왕들을 비판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된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덩샤오핑의 비석을 지나 황제릉의 안뜰로 들어가면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중국인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의 글씨가 새겨진 비석 두 개가 서 있다.

“중화 문명은 그 근원이 유구하고 그 흐름이 장구하도다(中華文明 源遠流長)” -장쩌민

“중화 문화를 드러내 펼치고 민족정신을 크게 떨치자(發揚中華文化 振奮民族精神)”-리펑

이 시대의 두 ‘제왕’이 세운 비석은 역대 제왕들의 비림(碑林) 대열을 이탈해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예나 지금이나 ‘나야말로 한족(漢族)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정치가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이 건설하는 역사는 중국인 특유의 과장법으로 신화화되고 인간의 기억에만 남은 신화는 다시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 우왕의 후손인 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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