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34>풍계유택

  • 입력 2002년 12월 6일 17시 50분


풍계유택(楓溪遺宅)은 ‘청풍계(靑楓溪)에 남아있는 외가댁’이란 의미다. 겸재의 외조부 박자진(朴自振·1625∼1694)이 세상을 뜬 뒤 그 자손들이 물려받아 살던 집이다.

박자진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다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자 자결한 퇴우정 박승종(退憂亭 朴承宗·1562∼1623)의 당질(5촌 조카)로 거부(巨富) 소리를 들을 만큼 부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의 옛 집이 있는 청풍계 초입에서 이만한 대저택에 살았던 모양이다.

겸재가 14세이던 숙종 15년(1689)에 부친 정시익(鄭時翊·1638∼1689)이 세상을 뜨고 이어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과 김수항(金壽恒·1629∼1689) 등 율곡학파의 중진들이 연이어 사약을 받고 죽는 참변을 맞는다.

이로 말미암아 겸재는 내외의 후원세력을 모두 잃게 된다. 그래서 외조부 박자진의 그늘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겸재에게 외가의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당연히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89 경복고 경내에서 살던 겸재가 그 맞은편 개울 건너의 청운동 50 일대에 있던 외가댁을 조석으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가 글공부와 그림공부를 하던 곳도, 외삼촌 외사촌들과 어울려 놀며 동네 친구들을 사귀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집보다도 외가의 구석구석이 그의 눈에는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런 외갓집을 화성(畵聖)으로 추앙되던 71세 때 그리게 됐으니 아마 눈감고도 그려낼 수 있었으리라.

북악산 기슭에 있는 그의 집에서 보면 외가의 본채와 후원 쪽만 바라다 보였던지 이 그림에서는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딸려있을 앞부분이 생략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저택의 면모가 완연하다. 인왕산을 등지고 있는 안채 정당(正堂)은 2층 누각이고, ‘ㄱ’자로 연결된 살림집은 겹집인데 담이 2중, 3중으로 둘러져 있으며 후원에는 대궐 전각 규모의 별채와 사당이 있다.

담 안 곳곳에는 각종 키 큰 나무들이 나이를 자랑하듯 위용을 자랑하며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인왕산 기슭 바위 절벽 아래에는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 서있다.

지금 이곳은 이렇게 넉넉한 생활공간이 아니다. 해묵은 나무는 고사하고 빈 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민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영조 22년(1746) 종이에 먹으로 그린 22×32.3㎝ 크기의 그림으로 보물 585호.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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