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25>낙건정

  • 입력 2002년 9월 26일 17시 51분


낙건정은 행주대교가 지나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덕양산 끝자락 절벽 위에 있던 정자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조판서를 모두 역임한 낙건정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이 벼슬에서 물러나 ‘건강하게 즐기며’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김동필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의 문인(門人)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 때 비록 소론이 됐지만 스승 및 벗들과의 관계 때문에 항상 노론적 성향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소론의 공격으로 경종 1년(1721)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 4대신들이 처형되고 왕세제(王世弟·왕위를 이을 임금의 아우)로 있던 영조가 환관들의 모함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과감히 나서 이들 환관들을 탄핵해 영조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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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의 벼슬은 왕세제를 교육하는 시강원 보덕(輔德)이었다. 그러니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강경파 소론의 눈밖에 나서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각오를 해야 했다. 이에 김동필은 경종 1년 이 낙건정을 행호 강변에 짓게 됐다.

낙건정이란 이름은 송나라때 대학자인 육일거사 구양수((六一居士 歐陽修·1007∼1072)의 ‘은거를 생각하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몸이 건강해야 비로소 즐겁게 되니, 늙고 병들어 부축하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 그 본래의 싯구다. 즉 젊고 건강할 때 은거해 삶을 즐기라는 뜻이다. 구양수가 이 시를 지은 때가 44세였는데 마침 김동필이 낙건정을 지을 때도 44세였다.

이런 내용들은 김동필의 동문 친구인 서당 이덕수(西堂 李德壽·1673∼1744)가 1726년 지은 ‘낙건정기(樂健亭記)’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도 이들과 동문이었다. 더구나 이병연은 김동필의 이종사촌 형. 그러니 겸재와 사천이 김동필의 초청으로 이 낙건정에 드나들었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겸재는 1740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서 낙건정이 있는 행주 일대를 익숙한 솜씨로 자주 화폭이 올리게 된다.

이 때는 이미 낙건정 주인 김동필이 세상을 뜬 지 3년이 지난 뒤였지만 김동필의 둘째 자제인 상고당 김광수(尙古堂 金光遂·1699∼1770)가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서화골동 수집과 감식의 1인자로 겸재 그림을 지극히 애호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는 높은 안목으로 낙건정을 더욱 운치있게 꾸몄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그 격조높은 생활환경을 확인할 수 있다. 행호 강변에서 절벽을 이루며 솟구친 덕양산 줄기 끝자락 상봉 가까이에 큰 기와집 두 채가 있다. 이 것이 낙건정의 살림집과 정자인가 보다. 산자락 끝 편에 위치한 별채 기와집이 낙건정이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한강의 상류와 하류쪽이 모두 한 눈에 잡히겠다.

멀리 한강 하구인 조강(祖江)으로 돛단배들이 무수히 떠 있어 드넓은 바다로 이어지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절벽 아래 강가에는 주인없는 배 한 척이 돛폭을 내린 채 대어져 있고 강변에서 낙건정으로 오르는 길만 두 갈래로 훤히 뚫려있다.

고요하고 한적한 낙건정의 분위기가 실감난다. 지금은 이 부근으로 행주대교가 지나고 있어 이런 운치는 간 곳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조 18년(1742)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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