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이 본 한양진경]<24>행호관어

  • 입력 2002년 9월 19일 16시 12분


행호관어는 ‘행호(杏湖)에서 고기 잡는 것을 살펴본다’는 뜻이다.

한강물은 용산에서 서북쪽으로 꺾여 양천 앞에 이르면 맞은편의 수색, 화전 등 저지대를 만나 강폭이 갑자기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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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안양천과 불광천이 강 양쪽에서 물머리를 들이미는 곳부터 서호 또는 동정호 등으로 불렀는데 창릉천(昌陵川)이 덕양산(德陽山)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한강으로 합류하는 행주(杏州) 앞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더욱 넓어진다. 이 곳을 행호(杏湖)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주는 본디 개백현(皆伯縣)이라 불렀었다. 고구려 때 한 여인이 현재 경기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 고봉산(高烽山)에서 봉화로 신호를 보내 안장왕(安藏王·519∼531)을 이 개백현에서 만났기 때문에 ‘다 나와 맞았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던 모양이다. ‘모두 개(皆)’의 뜻을 그대로 살리고, ‘맏 백(伯)’에서는 훈의 음을 따왔던 것이다.

그러던 것을 신라가 이 곳을 점유하고 나서 경덕왕 16년(757)에 전국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치면서 왕을 만났다는 뜻으로 우왕현(遇王縣) 또는 왕봉현(王逢縣)으로 바꿨고, 고려 초에는 행행(行幸·왕이 여행함)한 곳이라는 뜻으로 행주(幸州)로 고쳤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행주(幸州)와 행주(杏州)를 함께 쓰는 경우가 많아져 행주 아래 넓은 한강물을 행호(杏湖), 또는 행호(幸湖)라 쓰기도 했다.

아마 이 행주에 실제 살구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공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즐겼다는 고사를 연상하며 ‘살구 행(杏)’으로 대신했을 수도 있다.

어떻든 이런 행호에서 고기잡이가 한창이라 배들이 떼를 지어 그 너른 행호 물길을 가로막고 그물을 좁혀나가는 듯하다. 이처럼 큰 규모의 고기잡이 행사가 벌어지는 것은 별미 중의 별미인 이곳의 웅어와 하돈(河豚·황복어)이 잡히는 철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수라상(임금에게 올리는 진지상)에 오르는 계절의 진미였으므로 사옹원(司饔院)에서는 제철인 음력 3, 4월이 되면 고양군과 양천현에 진상을 재촉했다. 그러면 두 군 현에서는 고기잡이배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웅어와 복어잡이에 나섰다.

이 그림은 그 아름다운 행호에서 전개되는 고기잡이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양천현아 뒷산인 성산에 올라서서 서북쪽으로 행호를 내려다본 시각으로 그려냈다. 당연히 현재 행주외동 일대의 행호 강변의 경치가 한눈에 잡혀들었다.

오른쪽의 덕양산 기슭에는 죽소 김광욱(竹所 金光煜·1580∼1656)의 별서(別墅·별장)인 귀래정(歸來亭)이 들어서 있고, 가운데에는 행주대신으로 불리던 장밀헌 송인명(藏密軒 宋寅明·1689∼1746)의 별서인 장밀헌이 큰 규모로 들어서 있다. 송인명은 이 당시 좌의정으로 세도를 좌우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행주대교가 지나고 있는 덕양산 끝자락 바위절벽 위에는 낙건정 김동필(樂健亭 金東弼·1678∼1737)의 별서인 낙건정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행호 강안에서는 앞뒤로 7척씩의 고기잡이배가 대오를 지어 고기잡이에 열중하고 있다. 아마 고기잡이 노래가 강물 위에 가득 넘쳐흐르고 황금빛 복어와 은빛 찬란한 웅어가 그물에 갇혀 펄떡펄떡 뛰고 있을 것이다. 영조 17년(1741) 비단에 채색한 23.0×29.0㎝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최 완 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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